밀양을 여행하시면,

영남루와 빠질수 없는곳이 아랑각입니다.

밀양의 전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랑과 나비의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남루 윗쪽의 갈림길의 역활을 하는,

버튼을 누르면 흥겨운 노래가 나오는 장치가 있는 밀양 아리랑 노래비 입니다.

 

 

 

 

노래비에서 몇걸음 물러선후,

오른쪽의 내리막길을 잡아서 나무계단을 내려갑니다.

 

 

 

 

대나무숲이 그치며 밀양강이 지척인곳에,

조선시대의 사당인 아랑각이 자리해 있습니다.

 

 

 

 

늠름한 느티나무 고목이 앞을 지키고 있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처녀를 기리는 사당인 아랑각의 입구입니다.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고,

아랑각의 담장에 기대어 서있는 고목입니다.

 

 

 

 

삼문으로 이루어진 정문(正門)은,

정순문(貞純門)이라 편액이 되어있습니다.

정순문의 현판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예를 가르친,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진도 출신의 소전 손재형의 글씨입니다.

 

 

 

 

이곳은 죽음으로써 처녀의 정절을 지킨 아랑을 기리는 것으로,

조선 명종 때 세워진 것이라 전합니다.

1965년에 와서 원래있던 건물이 낡은 까닭에,

지역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성금과 당국의 보조로 현재의 아랑각을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사당은 맞배지붕의 3칸으로된 건물이며 전면에 세개의 문이 있습니다.

 

 

 

 

아랑각의 현판은 "아랑사" 입니다.

추사체 글씨의 현판은 성파 하동주의 작품으로 전합니다.

 

 

 

 

아랑각의 내부의 모습입니다.

중앙에 아랑 영전이 있으며 양쪽의 벽면에는,

아랑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사당 안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아랑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부탁으로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그렸으며,

육영수 여사께서 직접 봉안을 하셨다고 합니다.

진본은 밀양 박물관에 있으며 복사본 입니다.

 

 

 

 

아랑의 영정을 다가서서 봅니다.

 

 

 

 

좌,우 벽면에 배치된 아랑의 이야기입니다.

1958년 밀양 출신의 화가인 오태환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랑각의 유래(흰나비의 한)


아랑의 전설..

아랑은 우리나라의 공포설화중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깊은 전설로 청구 야담에 기록된 얘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이조 명종때 밀양 윤부사의 무남독녀인 동옥이란 처녀가 있었습니다.

동옥 즉 아랑(별명인듯)은 재주가 뛰어날 뿐 아니라 용모가 남달리 아름다워,

인근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고을 관노인 통인 "주기"가 신분도 잊은채 아랑을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기는 아랑을 유인해낼 방법으로 아랑의 유모를 돈으로 매수했고,

아랑의 유모는 휘영청 달이 밝은 날 아랑에게 달구경을 가자며 영남루 뜰로 데리고나온후,

소피를 보러 간다며 사라졌습니다.

유모가 자리를 피하자 아랑에게로 접근한 주기는 아랑을 겁간하러했으나,

아랑의 거센 반항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비수를 끄집어 내어 아랑을 위협했습니다.

아랑은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반항하다 결국에는 주기의 비수에 찔려죽고 말았답니다.

다음날 아랑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아랑의 종적은 찾을 수 가 없었고,

윤부사는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다 딸을 찾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윤부사가 떠난 후 새로운 부사들이 부임 했지만,

부임 첫 날밤에 원인도 모르게 급사하고 말았고.

이러한 일이 몇 번 되풀이 된 후로는 밀양부사로 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결국 폐군(군이 없어진 다는 겁니다)이 거론될 만큼 황급한 상황에 이르렀고,

붓장사 한 명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사나 한번하고 죽자는 마음으로 밀양부사를 자원했고,

많은 사람들은 또 송장 치우겠구나 라고 생각 했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심하게 불며 촛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신임부사 앞으로 피투성이의 처녀귀신 아랑이 나타났습니다.

부사는 처음엔 소름이 끼쳤으나 타고난 담력으로 아랑에게 호통을 쳤고,

아랑은 울면서 자신이 죽게된 사연을 얘기하고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아랑은 모든 이야기를 한 후,

내일아침 나비가 되어 자기를 죽인 관노의 갓에 앉겠다는 말을 끝으로 하직인사를 한 후 사라졌고,

이튿날 부사는 관속들을 모두 모이도록 명했습니다.

그러자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관노의 갓위에 앉았고,

부사는 형방을 불러 그 관노를 묶어 앞에 않히도록 한 후 주기를 다스렸습니다.

극구 부인하던 주기도 곤장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아랑을 죽이고 영남루앞 대숲에 던진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아랑의 시체가 원한에 맺혀 썩지않고 그대로 있었고,

주기를 죽여 아랑의 원수를 갚아 주고 난 후부터는 아랑의 원혼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고을도 태평해졌다고 전합니다.

 

그 후 아랑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 비를 세우고 그 옆에 사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아랑의 높은 정절을 추모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4月 16日 제관을 뽑아 원혼을 달래며 제향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랑의 얘기는,

우리나라의 처녀 귀신설화의 원조라 할수 있고 장화,홍련도 이런 류에 속합니다.

그리고 민요인 밀양 아리랑이 원래,

시집도 못가보고 죽은 아랑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음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매년 음력 4월 16일이면,

소복한 처녀들이 제관이 되어 제등을 밝히고,

그의 정숙한 넋을 기리는 아랑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랑각 앞의 왼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서있고,

 

 

 

 

울창한 대나무 사이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아랑의 시신이 발견 되었다는 곳이 있습니다.

 

 

 

 

아랑 유지비 입니다.

1910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문에는,

아랑유지(阿娘遺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랑각의 앞뜰에는,

12월 중순임에도 고운 자태의 장미가 피어올라 있습니다.

 

 

 

 

아랑의 전설을 상기하며,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위로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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