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루 마당 앞에는 천진궁이 자리해있고,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박시춘 생가가 자리해 있습니다.

 

천진궁과 길을 하나 사이에 두고,

조금 높은곳에 자리한 돌계단 위의 박시춘 생가입니다.

 

 

 

 

정면두칸, 측면 두칸의 초가지붕으로,

아담한 크기의 어릴적의 단칸방의 시골집을 연상케 합니다.

어릴적에 박시춘이 자란곳으로 전해지는곳입니다.

 

 

 

 

초가집의 옆면엔,

조그마한 창고 하나가 딸려있구요,

 

 

 

 

창고안에는,

짚으로 짠 커다란 멍석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작곡가 박시춘 입니다.

경상남도 밀양 태생으로 본명은 박순동(朴順東)으로,

아버지 박남포는 밀양에서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卷番)을 운영하였다.

박순동은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명창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이화중선(李花仲仙) 등의,

창(唱)과 노랫가락, 판소리 속에서 철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보통학교에 다닐 무렵 중병에 시달리며 아편까지 약으로 쓰던 아버지가,

2년 만에 타계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밀양 읍내 극장에서 상연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호객을 위해 거리를 누비던 악대가,

나팔 불고 북을 치는 행렬 속에는 극장광고 깃발을 들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그 대가로 저녁때 공짜구경을 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는 깃발 대신 북을 치는 꼬마 악대원이 되어 있었다.

이 시절 일본인이 경영하는 카페의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유행가에 매료되어 넘실대다가,

그 집의 심부름꾼이 되었으며 그는 이때부터 일본 노래를 통해 음악을 익혀갔다.

 

12세 되던 해 어머니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출하여 그가 찾아간 곳은,

유성기 음악을 들려주던 일본인 부부가 이사 가서 음식점과 여관을 경영하며 살고 있던 전남 순천읍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공연단체나 영화순회공연단에 가담하여 북을 잘 치는 소년악사가 되었으며,

멀리 만주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날 때 그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일본 본토 순회공연 때는 의젓한 영사기사가 되어 있었다.

전남 여수항에서 3년간 영화관의 영사기사로 일했으며,

다시 일본연예단을 따라갔다가 오사카(大阪)의 덴만(天滿)구락부 악사로 취직한다.

이때는 가요계에 기타라는 악기가 처음 등장하던 시절이었고,

그는 기타 음악에 몰입하여 중앙음악학교에 한 학기 등록하였다.

 

그 뒤 서울에서 새로 조직된 ‘아리랑 가무단’의 멤버가 되었으며,

이 때 구성과 연출을 맡아보던 홍개명(洪開明:후일 영화감독)이,

언제나 봄 같으라는 뜻으로 그의 예명을 박시춘(朴是春)으로 작명해 주었다.

당시 여가수 나선교(羅仙嬌)는 시에론레코드사 문예부장이던 이서구에게 유망한 작곡가라고 소개해 주었고,

그 후 홍개명이 작사한 「희망의 노래」를 작곡하여 김창배(金昌培) 노래로 취입한 뒤,

1935년 여름에 시판한 것이 박시춘의 첫 번째 작품이다.

 

시에론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朴英鎬)와 대담 중에,

학생복 차림의 까까중머리인 17세 청년 강문수(姜文秀)와 대면하였고,

그의 미성(美聲)에 반해 김상화(金尙火) 작사인 「눈물의 해협(海崍)」을 박시춘의 기타 반주만으로 녹음하였다.

 

1936년 가을 박시춘이 청진(淸津)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郞)의 연락으로 급히 상경하여 오케레코드사에 입사하게 된다.

1937년 김정구(金貞九)의 첫 취입 노래인 「항구의 선술집」이 호평을 받았고,

강문수(姜文秀)와 재회하여 남인수(南仁樹)라는 예명으로 「물방아 사랑」을 취입하였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발표했던 「눈물의 해협」 가락에,

이부풍(李扶風)이 작사한 「애수의 소야곡(小夜曲)」이라는 제목으로 재녹음하여,

1938년 정월(正月) 신보로 발매된 노래는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 이후 20여 년 동안 이들은 명콤비가 되어 수많은 노래를 취입하게 된다.

1939년 「감격시대」, 1943년 「서귀포 70리」가 일제시대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그는 일제의 목적가요 「아들의 혈서(血書)」(백년설 노래)·「결사대의 아내」 등,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노래로 오점을 남긴다.

 

1948년 조국분단의 비운을 노래한,

가거라 38선 (이부풍 작사, 남인수 노래)이 광복 후 그의 첫 작품이다(고려레코드사 제작).

1948년 일식음식점 주인 강(姜)씨의 재정 후원을 받아 명동 한복판에 럭키레코드 녹음실을 개설하고,

「신라의 달밤」·「고향 만리」·「럭키 서울」·「비 내리는 고모령」을 신인가수 현인(玄仁)의 노래로 취입하여,

계속 히트송을 만들어 냈다.

 

1950년 9·28서울수복 직후 정훈국 문예중대 제2소대 ‘가협(歌協)’에 문관으로 종군하면서,

「승리의 용사」·「전우(戰友)야 잘 자라」를 작곡하여 전후방에서 애창되는 진중가요가 되었다.

1953년 제주도 신병훈련소 종군하던 시절 신민요 「삼다도(三多島) 소식」(황금심 노래)과,

실향민의 애환을 그린 노래인 「굳세어라 금순아」, 1959년 「가는 봄 오는 봄」의 영화주제가도 크게 히트했다.

조긍하(趙肯夏)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육체의 길」의 음악을 작곡하여,

국도극장 개봉 당시 입장객 13만 명 동원이라는 흥행적 성공을 이룬 뒤, 그 후로도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 모든 문화단체가 장르별로 재조직되던 때인,

1961년 12월 한국연예협회의 초대회장에 피선되어 4대에서 7대까지 재선되었고,

1965년 예총부회장직과 1966년 예술윤리위원회부위원장직에도 선출되었다.

1973년 박시춘 회갑기념, 작곡생활 40주년 기념공연이 대한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는 무대에 서서 생전에 발표한 노래 3,000여 곡에 이른다고 피력했다.

1966년 방송드라마 주제곡 「돌지 않는 풍차(風車)」(문주란 노래),

1970년 가요곡 「일자상서(一字上書)」(김부자 노래) 이후 신곡을 만들지 않았다.

1981년 MBC방송국이 시행한 한국가요대조사(컴퓨터시스템을 통해 전국적인 연령별·직업별 조사)에 의하면,

일반 대중이 애창하는 100곡 중 박시춘의 작품이 10곡을 차지하고 있었다.

1982년 10월 가요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1955년 이후 영화음악 작곡에 전념하여 극영화 「구원의 애정」의 주제가 「물새 우는 강언덕」을 작곡하여,

악극단 출신 여가수 백설희가 취입하게 하였고, 앞서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으로 그녀를 톱가수로 만들었다.

1956년 극영화 「청춘쌍곡선」(한형모 감독)을 위시하여,

「벼락감투」·「가거라 슬픔이여」·「나그네 설움」·「오부자(五父子)」·「마도의 향불」 등 영화음악 작곡을 담당하였다.

그는 오향영화사(五響映畵社)를 창설하여 코믹영화 「삼등(三等)호텔」의 메가폰을 잡기도 했으며,

1959년 극영화 「살아야 한다」의 음악도 맡았다.

 

그의 심한 당뇨병과 수술불능의 녹내장에 시달리다 말년에는 시력을 잃고 3, 4년 동안 두문불출하였고,

1996년 6월 30일 오후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스카라극장 근처에 있는 가요작가동지회 사무실에서 노제를 지내고,

남양주시 가운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백과 사전에서 가져왔습니다)

 

 

 

 

 

박시춘의 대표곡인,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도 함께 있습니다.

 

 

 

 

박시춘 생가에서 내려와,

밀양 아리랑 노래비를 지나서 천진궁으로 향합니다.

 

 

 

 

영남루를 마주하며,

천진궁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입니다.

 

 

 

 

만덕문(萬德門)입니다.

겸헌(謙軒) 박창화(朴昌和. 1895년(고종 32)∼1962년)의 작품입니다.

 

 

 

 

만덕문에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목조기와의 천진궁이 들어옵니다.

 

 

 

 

천진궁은,

영남루(嶺南樓)의 부속건물로서,

효종 3년(1652)에 창건되었으며 공진관(栱桭館)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단군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御天大祭), 음력 10월 3일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던것을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천진궁 현판 입니다.

배수환(裵綉煥)이라는 분이 쓴 글씨이며,

영남루의 “능파각” 현판도 이분의 글씨 입니다.

 

우측 상단에 보면 개천4414년9월 이라 써있으며,

개천기원(開天紀元)을 사용하여 開天 이라 하였으며,

開天은 天神인 환인천제(桓因天帝)의 뜻을 받들은 환웅(桓雄)이 처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아래에서 홍익인간(弘益人間) 역사를 시작한 BC2457년을 말합니다.

 

단군기원(檀君紀元)인 단기(檀紀)는 단군(檀君)이 125세 되던해에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檀君朝鮮)-고조선(古朝鮮)을 세운해 입니다.

따라서 開天4414年은 1957년(檀紀4290년)을 뜻합니다.

 

 

 

 

천진궁(天眞宮)

조선 효종 3년(1652) 요선관이 있던 자리에 지은 누각으로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 객사에 세운 나무패로,

객사를 들른 관리가 이 패에 절을 하고 예를 표시함)가 땅에 묻히고 객사의 기능도 중단된 채,

일본 헌병들에 의해서 옥사(獄舍)로 쓰이기도 했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이래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바뀌면서 ‘대덕전’이라 하다가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누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목조팔작기와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 있다.

 

궁의 가운데에 단군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왼쪽 벽면에 부여 시조왕, 고구려 시조왕, 가야 시조왕,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오른쪽 벽면에는 신라 시조왕, 백제 시조왕,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가져온 글입니다)

 

 

 

 

천진궁의 내부에는,

단군의 진영을 봉안(奉安)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 음력 10월 3일 개천대제를 하고 있습니다.

 

 

 

 

후조선태조왕(後朝鮮太祖)의 위판(位版)입니다.

역대 8대 개국 시조왕의 위판은 조선태조와의 위판과 같습니다.

후조선이라 칭한것은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서 "후"자를 붙인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단군이 개국한 조선을 "고조선"이라 부르고 있슴과 동일합니다.

이 사당은 "단군"을 위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근세조선을 "후조선"으로 칭한것으로 보입니다.

 

 

 

 

천진궁의 옆에는,

용도를 알수없는 돌구조물이 보이는데,

제레후 제문을 태우는곳으로 보여집니다.

 

 

 

 

천진궁 뒤에있는 대덕전 현판입니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현판은 천진궁의 뒷쪽으로 옮긴것으로 보입니다.

 

 

 

 

천진궁의 오른쪽에는,

작은 소공원이 조성 되어있어 들어가 봅니다.

 

 

 

 

태상노군, 칠원성군, 삼신제왕이 비문에 있습니다.

태상노군(太上老君)은,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으로, 장자와 함께 도가의 시조입니다.

이 계보가 그대로 신선설을 주장한 신선가(神仙家)를 거쳐서 도교에 도입되어 도교의 교조로 숭앙받고 있습니다.

칠원성군(七元聖君)

북두대성칠원성군 / 칠성 이라고도 하며,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고 있습니다.

삼신제왕(三神帝王)

삼신상제(三神上帝)와 같은 말로 환인과 환웅치우 밎 단군왕검을 가리키는 말이나,

혹자들은 “삼신제왕”으로 그대로 풀어 “삼신할미”라고 하기도 하나,

이곳이 단군사당인것을 감안하면 “삼신상제”로 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단군상(檀君像)도 비석과 나란이 함께서있습니다.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의 뿌리를 되새겨 볼수있는,

천친궁을 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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