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 상동에 위치하고 있는 여주(驪州) 영월공원(迎月公園)은,

각종 문화유적과 숨은 보물이 있는 공원입니다.

 

영월공원(迎月公園)은 주차장도 여유가 있어,

주차에는 어려움이 없으며,

 

 

 

 

4월에는 새하얀 벚꽃 등을 즐길수 있는 곳으로,

여주 시민들에게는 근린공원으로 휴식처가 되고 있는데,

 

 

 

 

영월공원(迎月公園)에는 의외로 문화재들을 볼수 있어 찾아보면,

먼저 창리와 하리의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92호인 여주 하리 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으로,

본래 하리의 옛 절터에 서 있었던 것을,

1957년 11월에 한강변에 있는 영월루(迎月樓) 밑의 공원 산중턱으로 옮겨 세웠으며,

바로 옆에 보물 제91호인 여주 창리 삼층석탑(驪州倉里三層石塔)과 나란히 있는데,

 

 

 

 

석탑의 구성은 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일반형 양식을 계승하여,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은 방형탑이며,

이 탑은 외형의 온아한 비율이나,

각 부 구조의 규율성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 되는데,

탑이 속했던 사찰은 여주시내의 평지에 창건되었던 사찰이나 그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하층 기단의 구조는 일반적인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갑석(甲石)은 상면에 현저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상층 기단 면석을 받기 위한 높직한 2단의 테두리 장식이 있으며,

상층 기단 면석은 4매판석으로 구성하였는데,

2면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측면에까지 모각(模刻)하였고,

 

다른 2면에는 평판석을 그 사이에 삽입하는 구성형식을 취하였으며,

갑석은 평박한 편이고 밑에는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인 얕은 부연(副椽)이 있고,

그리고 상면 중앙에는 역시 높은 2단의 테두리 장식이 있으며,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이며,

각 층 옥신에는 우주형이 얕게 모각되었으며 초층 옥신은 특히 높은 편인데,

옥개석 각 층 받침은 4단이고 추녀 밑은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이르러 상향(上向) 하였고,

낙수면의 경사는 온화하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약한 편이며,

옥개석 정상에는 굄 1단이 있어 위층의 옥신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는 전부 결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옆에는 보물 제91호인 "여주 창리 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도 함께 있어,

 

 

 

 

높이 2.46m의 크기로,

원래 여주읍 창리 과수원 안의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하리 3층석탑과 함께 이곳 영월공원(迎月公園)으로 옮겼는데,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 탑의 초층 탑신석 윗면에서,

크기 16.7㎝×10㎝, 깊이 3㎝의 얕은 사리공(舍利孔)이 발견 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완전히 없어졌고,

하대석 밑에서 높이 4.4㎝의 동제여래좌상(銅製如來坐像)이 옮겨 세울 당시에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 탑의 조성 연대는 각 부의 조각과 조탑양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형태가 조금 독특한데,

기단 밑에 이중으로 여러 장의 석재(石材)를 사용하여 대석(臺石)을 삼고,

그 위에 1석으로 된 하층 기단(下層基壇) 면석을 얹었으며,

아래기단의 4면에는 안상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 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는 연꽃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을 조각하여 둘렀습니다.

 

 

 

 

탑신부는, 1층의 몸돌만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고,

2층 이상은 급격히 체감되면서 지붕돌 위에 몸돌을 붙여 1개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 받침은 3단이며 추녀는 두껍고 뭉툭하며 귀퉁이 끝의 들림도 둔한 편으로,

옥개석은 3층이 남아 있는데,

받침은 각 층 3단이고 추녀는 매우 두껍고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상향(上向)이 있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는 극히 완만하며 전각의 반전(反轉)도 희미하며,

 

 

 

 

탑의 상륜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현재 최상층의 옥신과 옥개석의 비례는,

2층 옥개석과 3층 옥신의 크기와 맞지 않아 그 사이에 1층이 빠지지 않았나 의심되는데,

따라서, 원래는 5층탑이 아니었던가도 추정할수 있으며,

조각기법이 엉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로 쌓는 등,

간략하게 처리한 모습에서 고려 중기 이후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2기의 삼층석탑에서 꽃길을 따라 위로 조금 오르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인 "영월루(迎月樓)"를 만나게 되는데,

 

 

 

 

안내문에는 옛 지도로 영월루(迎月樓)의 옛 위치를 전해 주고 있으며,

 

 

 

 

영월루(迎月樓)는 익공의 형태나 가구(架構)로 보아 18세기 말경의 건물로 추정 되며,

영월루는 원래 여주시청의 정문 이었는데,

1925년경 당시 신현태(申鉉泰)군수가 파손 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영월루(迎月樓)의 현판으로,

영월루 원래 현판이 따로 있었다고 하는데,

경기도 좌도(한양의 왼쪽) 고을 중 제일 좋은 누정이란 뜻의 "기좌제일류" 였다고 하며,

 

 

 

 

영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2층 누각 형식인데,

정면길이에 비하여 측면길이가 짧으므로 평면은 긴 장방형이며,

장대석 기단에 놓인 높은 사각 초석 위에 짧은 하층 기둥이 세워져 누마루가 꾸며지고,

 

 

 

 

마루 아래에 있는 나무계단으로 누마루에 올라 봅니다.

 

 

 

 

상층의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익공의 형태나 가구수법으로 미루어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 되는데,

 

 

 

 

하층 기둥위에 누마루가 꾸며지고 그 위에 상층 기둥이 세워져 이익공과 결구되고,

오량의 지붕가구가 짜올려져 있는데,

창방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문루의 가구법과 유사하며,

 

 

 

 

누각의 반대편에도 또다른 글씨체의 영월루(迎月樓)의 현판이 있습니다.

 

 

 

 

영월루(迎月樓)의 누마루에서 보이는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광으로,

 

 

 

 

숲속에 파묻힌 신륵사의 대가람이 한강변에 저 만치 보이고,

 

 

 

 

여주 시내의 일부인 중앙동과 여흥동 일원의 모습이 들어오며,

 

 

 

 

여주대교를 비롯하여 학동모연·팔대장림·마암어등 등의 여주팔경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영월루는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입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낮은 기단과 길다란 몸체,

그리고 치켜 들려진 팔작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되어 있는 누각 문화재 입니다.

 

 

 

 

영월루 아래에는 비석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비석군에는 홍만식 영세불망비(洪萬植永世不忘碑)를 비롯하여,

청백애민비, 선정비, 영의정 만세불망비, 열녀비, 거사비등 다양한 비석군이 조성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공덕비(功德碑)입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공산침략자와 싸우다가 전사한,

호국영령을 추도하기 위해 세워진 현충탑을 만날수 있습니다.

 

 

 

 

시내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근린공원 이지만,

봄철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꽃들과 함께,

유형의 문화재도 함께 찾을수 있는 곳으로,

경기도 여주의 영월공원(迎月公園)과 문화재(文化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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