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311에 위치하고 있는 재사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82호인 "안동 의성김씨 서지재사(安東 義城金氏 西枝齋舍)"입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재사로,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재사 서쪽 약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김성일 신도비의 건립연도가 1634년(인조 12)으로 기록되어 있어,

재사는 이보다 늦은 170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재사(齋舍)는 김성일의 묘소가 있는 산 아래의 동쪽 기슭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건물의 앞으로는 밭이 넓게 전개되어 있으며,

약 200m 전방에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통하는 국도가 보이며,

건물의 정면은 누다락집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는 뒤쪽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높은 터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마루의 바닥높이가 누마루 바닥보다 높으며,

 

"ㅁ"자형 재사의 5칸의 누다락 정면은 누하(樓下)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어간(御間)에 대문을 내었을 뿐 양옆의 앞쪽은 흙벽으로 막았고,

안마당 쪽을 개방하여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누하어간의 대문을 들어서면 각 변이 3칸인 방형 중정에 이르는데,

정면에는 3칸의 대청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지재사(西枝齋舍)의 주인인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며 이황(李滉)의 문인 입니다.

1556년(명종 11) 동생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수학하고,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 하였으며,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여러 벼슬을거쳐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경상도초유사로 임명되어,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 하였습니다,

사후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그리고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과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 되었는데,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수호히는 의성김씨의 재사로,

경북 안동의 재사 문화재인 "의성김씨 서지재사(安東 義城金氏 西枝齋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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