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인 "흥법사지(興法寺址)"입니다.

 

안창리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는 "흥법사지(興法寺址)"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인 흥법사(興法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사지에는 흥법사지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을 뿐이며,

사찰터 주변 일대는 농경지로 변했는데,

 

 

 

 

"고려사" 세가 태조 23년조에 "왕사충담사수탑우원주영봉산흥법사친제비문"이라는 기록이 있어,

충담(忠湛, 869~940)은 진공대사(眞空大師)의 속명으로 신라대 사람인데,

당나라에 가서 수도하고 돌아와 고려 건국후 태조의 왕사가 되었으며,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친찬하였다고 하였으니,

고려 초기에 이미 이곳에 흥법사(興法寺)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흥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 때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이곳에는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이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과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만이 남아 옛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흥법사지(興法寺址)에 남아있는 문화재는 2기만 있어,

그중 하나인 보물 제463호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로,

귀부의 높이는 75㎝에 이수 높이는 99㎝의 크기이며,

 

 

 

 

신라말 고승인 진공대사(眞空大師)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어 940년(태조 23년)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비이며,

비신은 경복궁에 옮겨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며,

이 비에 따른 부도도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졌습니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는데,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 하였으며,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고,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이며,

 

 

 

 

진공대사 충담(忠湛, 869~940)은 신라 경명왕 때 활동했던 심희(審希)의 제자로,

입당(入唐) 유학하고 918년(태조 원년)에 귀국 하였는데,

이후 921년(태조 4) 고려 태조로부터 왕사(王師)에 임명 되었는데,

충담이 흥법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부임한 시점은 대략 922년(태조 5)에서 924년( 태조 7) 사이의 시기로 여겨지며,

그는 흥법사에 머물면서 원주 지역을 교화하는데 노력 하였으며,

서기 940년(태조 23) 7월에 흥법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입적 직후 승탑이 바로 건립 되었고,

탑비는 그다음 해인 941년(태조 24)에 조성 되었습니다.

 

 

 

 

진공대사탑비 옆에는,

보물 제464호임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原州 興法寺址 三層石塔)"가 있어,

탑의 높이는 3.69m이며,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며,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 하였으며,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고,

2장의 널돌로 덮은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평박(平薄)해 보이는데,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없고 윗면에는 경사가 있으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3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인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 있고,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 입니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탑으로,

이 석탑은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석재 구성이나 표면 조각도 기백을 잃고 약체화되어 있어,

고려 초기 이후에 건립 되었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국보 제104호 염거화상탑과 보물 제365호인 진공대사탑 및 석관은,

이곳을 떠나 다른곳에 머무르고 있지만,

진공대사탑비와 삼층석탑만이 남아 폐사지를 지키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왕사가 주석하는 대찰이었던 곳으로,

원주의 폐사지인 "흥법사지(興法寺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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