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부론면(富論面) 정산리(鼎山里)의,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로,

원주의 폐사지인 "거돈사지(居頓寺址)"입니다.

 

"원주 거돈사지(原州 居頓寺址)"는 사적 제168호로 지정 되었으며,

 

 

 

 

거돈사지(居頓寺址)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절터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되었다고 하며,

사지에는 금당지와 불좌대가 남아 있는데,

주초석들의 배치상태로 보아 큰 규모의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지 내에는 삼층석탑(보물 제750호)과 고려 현종 16년(1025)에 건립된 원공국사 승묘탑비 (보물 제78호),

출향문화재인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190호) 재현품이 있습니다.

 

 

 

 

금당(金堂)터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 이었지만,

고려 중기에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고 하며,

 

 

 

 

1금당 1탑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이 절터에는,

높은 축대 위에 중문을 세운 자리가 있으며,그 뒤로 3층석탑과 금당터, 강당터가 남아 있는데,

금당은 사찰의 중심건물로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큰규모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금당터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좌대(佛坐臺)가 있으며,

 

 

 

 

불좌대의 대석(臺石) 주위에는,

원래의 위치로 보이는 주춧돌들이 비교적 정연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는데,

기단(基壇)은 대부분의 지대석과 면석이 남아 있어,

나말 여초(羅末麗初)의 사찰로는 매우 희귀하게 유존 상태가 좋은편 입니다.

 

 

 

 

금당의 오른쪽과 뒤로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으로,

큰스님이 설법하던 장소인 강당터 등이 있는데,

고대에는 금당의 뒤쪽에 강당을 배치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금당의 앞쪽에 배치하게 되었다고 하며,

 

 

 

 

거돈사지의 한쪽에서는 우물터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금당 앞에는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어,

 

 

 

 

보물 제750호인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原州 居頓寺址 三層石塔)"으로,

높이 5.4m의 규모이며 일반형의 다른 석탑과 달리,

토단을 마련하고 3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방단(方壇)을 만든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며,

 

 

 

 

방단의 남쪽면에는 돌계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흙을 둔덕지게 쌓아 지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은 4매의 장방형 판석을 엇물리기식으로 결구하였고,

위에 상층기단 하대석 또한 4매의 판석을 동일형식으로 쌓았으나 지대석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하층기단의 구성은 판석 사이에 장방형 판석을 끼워놓고,

모서리기둥인 우주(隅柱 )와 받침기둥인 탱주(撑柱)를 새겼고,

하대중석(下臺中石) 또한 4매로서 각 면의 중앙부에서 접합시켰으며,

그 상부 낙수면 위로는 중석받침과 1단의 탑신받침이 있고,

상층기단 중대면석(中臺面石)은 남북쪽에 양 우주가 표현되게 장면(長面)을 대고,

동서면에 탱주만 새긴 면석을 끼워맞춘 방식이며,

수평한 낙수면을 가진 상대갑석(上臺甲石) 위로는 몰딩과 각형(角形) 탑신 굄을 만들었습니다.

 

 

 

 

탑신부 층마다의 옥신·옥개석을 한 돌로 구성하고,

각 층 옥신에 양 우주를 새겼으며,

옥개부의 낙수면은 두꺼우면서도 끝 부분을 살짝 반전시켰고,

옥개받침은 각 5단씩 표현 되었으며,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의 2단 굄으로 위층 옥신석을 받쳤고,

옥개석마다 전각부(轉角部)에 풍경인 풍탁(風鐸)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 위에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초층탑신이 기단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 왜소한 감을 주며,

옥개가 반전하면서도 전각을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마무리한 점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형식을 충실히 계승한 수작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금당의 동쪽인 오른쪽 위에는,

보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가 있어,

탑비의 주인공인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은

930년(태조 13)에 출생하여 1018년(현종 9) 88세로 입적한 고려 전기의 고승으로,

그는 광종대를 전후하여 일시적으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법안종의 승려로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 하였습니다.

 

 

 

 

지종(智宗)은 8세 때 개경의 사나사에서 삭발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에서 수계를 받았고,

953년(광종 4)에 봉암사로 갔으며 이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러 있었으며,

30세가 되는 해인 959년(광종 10)에 고달원의 증진대사 찬유가 꿈에 나타나 중국 유학을 권하여,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을 갔으며,

 

 

 

 

41세가 되는 해에 다시 찬유가 꿈에 나타나 귀국을 종용하니 고려로 돌아와,

970년(광종 21)에 귀국한 지종은 광종으로부터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고 금광선원에 거주 하였으며,

이후 지종은 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대까지 왕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며,

대선사를 거쳐 84세인 1013년(현종 4)에 왕사(王師)에 책봉 되었고,

 

 

 

 

87세인 1016년(현종 7)에는 질병을 얻어 하산을 권유 받았으며,

지종은 수도인 개경에 머무는 것은 "자리(自利) 때문이 아니라 타리(他利)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거절 하였으나,

2년 후인 1018년(현종 9) 4월 왕에게 하직하고 거돈사로 하산 하였고,

4월 17일 8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4월 22일 장례를 치렀으며,

입적 후 원공국사(圓空國師勝)로 추증 되었습니다.

 

 

 

 

탑비의 세부를 살펴보면,

수 매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탑비를 조성 하였는데,

귀갑은 반원형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며,

팔각의 귀갑문에는 화문과 "만(卍)"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귀갑문 끝부분에는 테두리가 둘러져 있으며 그 위에 4엽의 화판을 가진 꽃문양이 시문 되어 있습니다.

귀갑 상부에는 방형의 비신 받침이 있고,

비신 받침 측면에는 화려한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안상 중앙에는 꽃봉오리가 솟아나 있는데,

꽃봉오리가 중앙에서 솟아난 형태의 장식을 갖춘 안상은 11세기에 주로 유행한 문양 형식이라 합니다.

 

 

 

 

용두는 뺨의 측면에 지느러미와 유사한 비늘이 있는 어룡형이며,

 

 

 

 

비신 위에는 방형의 이수가 있어 이수 하단에는 수직선으로 장식하였으며,

수직선 위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하게 조각 하였고,

구름 위에는 정면 2마리, 측면 각 1마리, 후면 3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이수 상면에는 보주를 중심으로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9마리의 용이 이수에 조각되어 있으며,

 

 

 

 

비신은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글자의 판독도 용이하며,

비문은 당시 대표적 문인인 최충(崔沖)이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썼다고 하며,

각자는 정원(貞元), 계상(契想),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이 담당하였는데,

구양순(歐陽詢)·구양통(歐陽通) 부자의 서법이 어우러진 서체이며,

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거대하고 당당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기본적인 외형은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와 유사하며,

하지만 세부적인 표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특히 용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점, 귀갑 위에 새겨진 문양의 형식화가 진행된 점,

이수의 운룡문 조각이 평판적인 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으며,

승탑과 탑비의 건립은 문도들의 주도로 현종과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하에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거돈사지(居頓寺址) 안쪽의 산아래에는 승탑이 한기 서 있어,

 

 

 

 

보물 제190호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으로,

고려시대 초기의 고승 원공국사(圓空國師)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으로,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반출되어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방 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졌다가,

원래의 승탑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으며,

이곳의 승탑은 2007년에 복원품으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은,

평면 팔각으로 팔각원당형의 신라 승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데,

단정하고 균형잡한 형태에 장식은 격조가 있으며,

중대석 문양과 세부적인 치석수법의 차이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을 모방하고 있어,

이 승탑은 지종이 입적한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비는 1025년(현종 16)에 건립 되었으며,

원공국사탑이 거돈사 밖으로 반출되었을 때 지대석은 함께 이동하지 않았는데,

남아있는 지대석 2매는 원래의 자리에 있던것이라 합니다.

 

 

 

 

하대석은 팔각이며 하대 하석에는 면마다 안상이 조식되어 있고,

안상 하단 중앙에는 화문이 솟아오르게 조각되어 있고 하대 상석에는 복련이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에 비하여 평면적이며,

중대석 면석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8기의 안상 내부에는 발목을 겹치고 있는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상대석은 세 겹으로 연판이 겹친 앙련이며 연판 내부에는 화려한 화문이 조식되어 있으며,

상대석 상면에는 2단의 탑신괴임이 조출되었으며 팔각의 탑신석이 그 위에 있습니다.

 

 

 

 

탑신은 팔각형인데 각 모서리마다 주위를 화형으로 장식한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이것은 이 부도가 승려의 사리탑이면서도 불탑의 형식을 따르려했던 의도를 엿보게 하는것 이며,

탑신석은 정면과 후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비(門扉)를 조각하였고,

정문의 문비 위에는 탑호명인 "원공국사승묘지탑(圓空國師勝妙之塔)"을 양각해 놓았고,

문비의 양 측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살창을 조각하였으며,

 

 

 

 

이 사천왕상과 원공국사탑을 비교해 보면,

여래를 중심으로 칼을 든 서방 광목천, 창을 든 북방 다문천의 순서가 그대로 일치함을 알 수 있는데,

사천왕상의 신체는 양감이 배제되어 있지만, 얼굴에는 양감이 집중되는 특징이 나타나며,

이처럼 상호 표현에 양감이 강하게 표현되는 양식은 11세기 초반경 정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옥개석 역시 팔각으로 탑신석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새겼는데,

추녀는 얇고, 각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일반적 팔각원당형 부도의 형식처럼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으며,

 

 

 

 

옥개석 위에는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유사한 형태의 보개(寶蓋)가 있으며,

보개의 상면에는 보주가 있습니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 팔각원당(八角圓堂) 형식의 대표적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신라 부도의 양식을 이어받아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하며,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고 있으며,

게다가 전체적으로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이는데,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 시대 부도(浮屠)의 정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돈사지(居頓寺址)는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 졌으며,

절터에는 중문터와 석탑 그리고 금당터와 강당터, 승방터와 회랑 등이 확인 되었습니다.

 

 

 

 

신라시대에 개창이 되어,

고겨시대에는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던 사찰 였으며,

왕사(王師)가 거(居)하는 회랑을 갖춘 고식의 사찰였으나,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소실되어 절터만 남아 있는 곳이며,

석탑과 탑비 그리고 승탑과 유구들이 남아 옛사찰을 지키고 있는 곳으로,

원주의 폐사지인 "거돈사지(居頓寺址)"입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