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으로의 여행에서 찾은곳은,

청도 무안의 "어변당" 입니다.

 

밀양의 무안면 어변당 곁에는,

저수지가 자리해 있어 여유로움과 시원함을 줍니다.

 

 

 

 

정리문(正履門)을 통하여 어변당을 찾아봅니다.

바르게[正] 밟는 [履] 정심(正心) 정행(正行)의 행보(行步)라야 한다는 뜻을지닌 외삼문 "정리문" 입니다.

 

 

 

 

정리문을 들어서면,

전사청(典祠廳)이 자리해 있으며,

 

 

 

 

1978년 향내 사림측의 진정과,

17대손 박해곤(朴海昆:신라대학이사장)의 주도하에 박곤 장군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당시 국내 사계의 권위자와 재부 각 대학교 사학과 교수 합동 연구회에서 세종실록 등 사료에서 사실로 규명되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에 건의하여 국고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경역확장과 본 충효사의 개축과 동시에,

덕연서원 등 기타 조영 건물들도 1980년, 마침내 완공을 보게 되었다.

(어변당 일원의 조성내력입니다)

 

 

 

 

전사청(典祠廳)과 함께 덕연서원의 부속건물입니다.

 

 

 

 

덕연서원(德淵書院)입니다.

북방 야인 정벌 및 육진 개척, 남방 대마도 왜구 정벌 등 나라를 위한 어변당 공의 업적에 이어,

어변당 박곤의 현손(玄孫/손자의손자)인 모우당(慕憂堂) 박몽룡(朴夢龍)공 또한 나라를 위한 충절이 현저하므로,

이를 기리어 세덕사(世德祠)에서 사림의 주관으로 향사를 받들어 왔습니다.

박몽룡공은 대구망우공원내 영남충의단에 배향되어 있으며,

한성판윤 어변당 박곤(魚變堂 朴坤)을 주벽(主壁)으로,

훈정 모우당 박몽룡(訓正慕憂堂朴夢龍), 처사 죽림재 박세용(處士竹林齋朴世墉)공을 봉향하는곳으로,

경남 함안에도 덕연서원이 있습니다.

 

 

 

 

덕연서원의 현판입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둔,

덕연서원 일원의 잘정비된 모습입니다

 

 

 

 

덕연서원에서,

어변당으로 들어가는 중간문인 "유제문"입니다.

 

 

 

 

유제문의 현판 이구요,

 

 

 

 

어변당과 덕연서원 사이의,

공을 들인 담장의 모습도 보입니다.

 

 

 

 

총효사(忠孝祠)입니다.

충의(忠義)와 효행(孝行)을 상징하는 사우(祠宇)로,

중앙에 한성판윤 어변당 박곤공, 좌좌(左座)에 임진왜란 때의 선무원종공신인 훈련원정 모우당 박몽룡공,

우좌에 처사 죽림재 박세용(朴世墉)공아 배향되어 있습니다.

주독(主牘/신주를 모셔두는 함)이 있는 이곳에서 매년 음력 8월 하정일(下丁日)에,

영남 유림의 주관으로 추향대제를 봉행한다고 합니다.

 

 

 

 

충효사의 현판입니다.

 

 

 

 

어변당 뒤에서,

늠름하게 지키듯 자리한 충효사 입니다.

 

 

 

 

어변당과 적룡지 입니다.

적룡지는 1413년(태종13년, 당 17세) 거실 앞 공터에,

종. 횡 11m, 깊이 2m의 사각형 못을 파고,

부모님의 봉친을 위하여 고기를 길렀기 때문에 주위에서 '효도지'라 불렀습니다.

1423년년 (세종5), 못에 있던 붉은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여,

적린(赤鱗) 한 쌍을 남기고 승천하는 이변이 일어난 후부터 이 연못을 '적룡지'라 불렀으며,

거실을 '어변당(魚變堂)'이라 칭하고, 박곤의 호 어변당도 여기에서 전래 되었다고 합니다.

연못 중앙에는 돌로 섬을 만들어 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신선이 산다는 동해의 봉래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선사상을 반영한 것이며,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날의 연상리(淵上里)는 이 적룡지를 기준한 동명이고,

상당동(上堂洞)도 '높은 집이 있다'는 의미로, 어변당의 소재에서 연유된 동명입니다.

 

 

 

 

 

 

적룡지옆, 어변당공이 심었다는,

수령 500여 년, 높이 20여 m인 '경상남도 고목지정'의 나무로서,

공의 행적에 대한 산 증거인데, 낙뢰로 원형이 제법 손상되었지만..

아직도 성엽(盛葉) 중이며 피뢰침을 설치하여 안전성에 대비하였다고 합니다.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는,

벼락을 만나 속이 비어도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박곤 장군의 효심과,

물고기의 은덕을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 봅니다.

 

 

 

 

어변당은 조선조 세종 때, 한성판윤을 역임한 어변당 박곤장군의 거실(居室로서,

고려말의 건축 양식으로 1651년(효종2)에 중수하고, 1754년(영조30)에 중건(重建)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병화로 많은곳이 소실이 되었으나 이곳은 온전하게 남았다고 합니다.

 

 

 

 

어변당의 현판입니다.

 

 

 

 

어변당에서 적룡지와 주변을 내다봅니다.

 

 

 

 

말끔하게 정비가되고,

관리를 잘해서인지 경내는 깔끔합니다.

 

 

 

 

향토사료관(鄕土 史料館)입니다.

어변당공의 15대손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박기우(朴起羽)장군의 유품 일체 및,

부산포진 해유 문서(海由文書/지방문화재 108호), 안동진영 중수기(安東鎭營 重修記),

장군의 영정(영정/지방문화재 제344호), 박씨 문중 고문서(古文書)가 소장되었다가,

2008년 6월 20일 밀양시 박물관이 개관될 때 기증하여 전시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나름 여러가지 물품들이 진열이 되어 있으며,

 

 

 

 

박기우(朴起羽)장군의 영정도 있습니다.

 

 

 

어변당(魚變堂)

밀양시(密陽市) 무안면(武安面) 연상리(淵上里) 상당(上堂)마을에 있다.

어변당(魚變堂)은 조선조(朝鮮朝) 초기에 많은 무용담(武勇談)과,

설화(說話)를 남긴 비룡장군(飛龍將軍) 박곤(朴坤)의 유적지(遺跡址)로서,

지당(池塘/못)의 고기가 룡(龍)으로 화하여 승천(昇天)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본래 이곳은 박곤(朴坤)의 거주지로서 상당곡(上堂谷)이라 하였으며,

주거 옆에는 한 지당(池塘)이 있었다.

이 지당은 효성이 지극한 박곤이 양친(養親)을 위하여 고기를 기르고자 집 앞에 판 작은 못이었다고 한다.

매양 조석으로 밥을 던져주어 순치(馴致/길 들여진)된 고기 한 마리가,

어느 날 적린(赤鱗/붉은빛의 고기허물)을 남기고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고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 연못을 고기가 승천한 집 즉 ‘어변당(魚變堂)’이라 하였다.

박곤은 이 일을 계기로 3차나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변방(邊方)의 왜구(倭寇)를 정벌했는데,

고기가 등천(登天)할 때 남긴 적린(赤鱗)으로 말안장을 장식했더니 말이 나는 용과 같이 빨랐다 하여,

왜적이 ‘비룡장군(飛龍將軍)’이라 불렀다 한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 행차에 무관으로 따라가 중국 황제(皇帝)와 전대(專對)한 자리에서,

장용(壯勇)을 시험한 결과 초인의 담용(膽勇)을 보고 감탄한 천자(天子)가,

화녀(華女/중국여인)에게 장가들게 하여 붙들어 두었다.

그 뒤 박곤은 고국을 잊지 못하여 귀국할 때,

중국에 남겨둔 세 중국 처는 아들 하나씩을 얻어 일걸(一傑). 이걸(二傑). 삼걸(三傑)이라 하였는데,

아들은 또 각기 자손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에 명장(明將) 유정(劉綎)의 군교(軍校)로서 종군한 삼걸의 자손이,

이곳으로 족친(族親)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일화(逸話)도 전해 온다.

고국에 돌아온 박곤은,

그 후 각 지방의 성기(城基)를 자세히 보아 살펴서 국방에 이바지한 공적이 있고,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에까지 올랐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어변당(魚變堂)의 창건과 역사는 박곤의 재세와 함께 조선조 초기로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그 후손인 모우당(慕憂堂) 박몽룡(朴蒙龍)이 창의(倡義) 종군하여 빛나는 공훈을 세우고,

전쟁이 끝난 1599년(宣祖 32 己亥)에 고가(古家)에 돌아오니 마을은 온통 회진(灰塵)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유독 어변당(魚變堂)과 소지(小池)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하니,

이는 지당(池塘)에 서린 선조의 충효와 신물(神物)의 감응(感應)에 인한 것이라 하였다.

모우당(慕憂堂)의 귀향으로 어변당(魚變堂)은 다시 보수가 되었고 지당도 수축됨으로써,

이후 수백 년 동안 어변(魚變)의 전설과 함쎄 보존의 기틀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1652년(孝宗 3 壬辰)에는 당시밀양부사(密陽府使)였던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祚)가,

박곤 장군의 충효에 어린 이적을 감탄하여 [어변당기(魚變堂記)]를 지었고,

1708년(肅宗 34, 戊子)경에 후손인 죽림재(竹林齋) 박세용(朴世墉)의 주동으로 당지를 중수할 때도,

청옹(聽翁) 이명기(李命夔)가 [어변당기(魚變堂記)]를 지어 박곤 장군의 충효를 찬양하였다.

그후에도 후손들에 의하여 크고 작은 보수가 거듭되었으며,

1965년(乙巳)부터는 어변당(魚變堂) 유적보전을 위한 정화사업을 계획하여,

지방관청(地方官廳)과 정부(政府)에도 지원을 청원하였다.

1967년(丁未)에 어변당 박곤장군기념비(魚變堂朴坤將軍記念碑)를 세웎고,

1979년(己未)에는 경남도지정(慶南道指定)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제190호로 등록되었으며,

1980년(庚申)에는 주위의 부지를 매입하여 경역(境域)을 대폭확장(大幅擴張)하였다.

(이해를 돕기위해 가져온 글입니다)

 

 

 

 

어변당의 앞에도 문이 나있습니다.

 

 

 

 

상강문(尙綱門)입니다.

어변당과 충효사의 정문으로,

사람이 행하여야 할 '君臣. 父子. 夫婦'의 삼강(三綱)과,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의 오상(五常)을 숭상(崇尙)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상강문의 현판이구요,

 

 

 

 

상강문을 나와,

어변당 왼쪽의 충효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창고로 보이는 두칸짜리 건물이 있습니다.

 

 

 

 

아주 작게 붙어있는 표지를 보니 화장실 입니다.

 

 

 

 

충효 공원입니다.

 

 

 

 

마을의 소공원처럼,

작은 규모로 조성이 되어있으며 기념비가 보입니다.

 

 

 

 

소공원의 맨 안쪽에는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신도비각(神道碑閣)입니다.

보통 종이품 이상의 관원의 무덤 가까운 길가에 세우는데,

어변당 박곤장군의 신도비 입니다.

 

 

 

 

이곳 신도비각도,

잘정비가 되어있고 관리도 잘해둔 모습입니다.

 

 

 

 

신도비각을 돌아봄으로,

어변당과 함께조성된 유적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밀양에서 들러봄직한 유적지 어변당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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