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1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문경 대승사의 "윤필암(潤筆庵)"입니다.
산북면 사불산(四佛山)의 묘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윤필암(潤筆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인 대승사(大乘寺)의 산내 암자이며,
들어 가기전 안내문을 통하여 윤필암의 위치와 규모를 짐작해 봅니다.
전두리 마을에서 올라 오거나,
대승사를 돌아보고 윤필암으로 오는길에는 숲길로 되어 있어,
산책 삼아서도 거닐어 볼만 하며,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만 향하면,
윤필암(潤筆庵)에 이르게 되는데,
윤필암(潤筆庵)은 고려 후기인 1380년에,
승려 각관(覺寬)과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창건 하였으며,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찰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기문(記文)을 썼다고 하며,
1380년(우왕 6)에 승려 각관과 찬성(贊成) 김득배의 부인 김씨가 창건하였는데,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이색에게 기문을 요청 하였고,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며,
윤필(潤筆)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 합니다.
윤필암의 입구에는 귀한 백송(白松)을 볼수있어,
백골송이라고도 불리는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오래전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처음 가져다 심기 시작한 나무이며,
껍질이 벗겨지면서 백색을 나타내기 때문에 백송이란 이름이 붙여 졌으며,
다른 소나무보다 번식도 잘되지 않고 생장이 아주 느린 편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전면이 7칸이나되는 커다란 전각을 만나게 되는데,
바깥의 문을 열고 쪽마루 너머에는 관음전(觀音殿)이 있어,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는데,
불교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로,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되고 있는 부처님으로,
이날 관음전에는 망자의 혼을 달래는 제를 올리는 듯한 모습을 볼수 있고,
관음전의 마당에서는 사불전(四佛殿)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계단을 통하여 사불전(四佛殿)으로 올라봅니다.
사불전(四佛殿)은 어느 법당과 달리 불상이 없는 법당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데,
유리 너머로는 그저 산의 모습만 들어오고,
조금더 확대를 해서보니 산의 봉우리에 무엇인가 보이는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설화로,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으며,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하는,
대승사(大乘寺)의 창건 설화가 있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어,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03인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聞慶 大乘寺 四面石佛)"로,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각형 형태의 방주석(方柱石)으로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사면(四面)에는 모두 불상 1구씩이 새겨져 있으며,
불상은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세부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모두 여래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면석불은 사방불이면서도 신라의 왕도인 경주가 아닌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며,
비록 마멸이 심하여 불상의 세부파악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사방불 입니다.
사불전 옆에있는 암벽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5호인 "문경 윤필암 삼층이형석탑(聞慶 潤筆庵 三層異形石塔)"이 있다고 하나,
위로 올라가는 길이 없어 오르다 포기 하였는데,
섯탑의 윗부분만 조금 보이고 있으며,
사불전을 나와 관음전 옆으로 나있는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전각이 나타나며 앞마당에는 석탑이 한기 있어,
사불선원(四佛禪院) 앞마당에 있는 석탑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6호인 "문경 윤필암 삼층석탑 (聞慶 潤筆庵 三層石塔)"이며,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복련 장식과 기단부 상층 기단면석에 3개 연속의 탱주 모각,
이를 현존 탑과 비교하면 건립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추후 마당에 묻힌 기단부를 노출시켜 확인하면,
보다 정확한 기단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윤필암 삼층석탑은 특이한 기단구조와 문양,
상층기단부 면석 탱주의 3단 구성, 상대갑석 윗부분의 옥신석 받침 등에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탑신부는 2층 탑신석이 멸실된 상태이나,
잔존 1층 옥개석 상면의 탑신받침 규격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3층 석탑으로 추정되며,
1층 탑신석 남면에는 조각된 문비가 뚜렷하게 있고,
윤필암 삼층석탑은 마모가 심하나,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확립된 양식에,
고려시대 석탑의 창작성 및 예술적 특성이 가미된 3층 석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면 7칸이나 되는 건물에는 "사불선원(四佛禪院)"의 현판이 있고,
입구에는 산사의 겨울을 보낸 털신이 놓여 있으며,
사불선원도 관음전과 같이 긴 쪽마루를 거쳐서 법당으로 들어갈수 있습니다.
너른 법당 안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대승사 윤필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大乘寺 潤筆菴 木造阿彌陀如來坐像─紙龕)"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 되었으며,
불상 높이 32㎝, 어깨 너비 16㎝, 무릎 너비 23㎝의 규모로,
도금(鍍金)된 것으로 1950년대 중반 도난당할 뻔했을 당시에,
왼손 끝 부분이 부러져 수리한 것으로 제외하고는 온전한 상태이며,
복장(腹藏)의 "개금원문(改金願文)"에 의하면,
1851년(철종 2)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개금이 이루어 졌으며,
그러므로 불상 조성의 하한 연대 역시 1851년 이전으로 상정되며,
지감(紙龕)은 두터운 한지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검은색 감실로,
이는 아미타불상 안치를 목적으로 만든 것을 감안할 때 불상 조성 시에 함께 만들었거나,
아니면 이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불선원을 뒤로하고 윗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르면,
맞배지붕의 현판이 없는 선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나오고,
건물 뒤편에는 작은 전각이 자리하고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의 삼성각(三聖閣)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그리고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인 삼성각(三聖閣)이며,
산신(山神)은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畵)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하며,
독성(獨聖)은 나반존자(那畔尊者) 라고도 하며,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는데,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기도 합니다.
윤필암(潤筆庵)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던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 졌다고 하며,
윤필암(潤筆庵)의 삼성각(三聖閣)에서 보이는 풍광은,
세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합니다.
대승사(大乘寺)의 산내 암자 이지만,
관음전을 비롯하여 사불전과 산신각 그리고 선원이 갖추어진 비교적 규모가 큰 암자로,
비구니들의 수행처로 알려진 암자인 곳으로,
경북 문경의 대승사 암자인 "윤필암(潤筆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