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파계사로 가려면,

불로동을 지나면서 동화사와 갓바위와 파계사 방향으로 길이 나뉘는,

파군재 삼거리 를 앞에둔.. 봉무동을 지날즈음에 "봉무정"이 있습니다.

 

봉무정(鳳舞亭)은,

불로동에서 팔공산쪽으로 큰 도로를 따라 약 1km 정도 가면,

도로의 왼쪽에 도로와 접하여 좌측에 불쑥 튀어 나온 나지막한 야산인,

봉무토성의 동쪽 기슭에 주위로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봉무정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두그루 서있으며,

그중 큰나무는 범상치 않아 보이며 벼략을 맞은듯 합니다.

 

 

 

 

봉무정의 왼편으로는,

금호강(琴湖江) 연변의 나지막한 구릉지에 위치한,

전체적인 형태나 축성수법 등이 경주의 월성(月城)이나 대구의 달성(達城)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성벽 둘레가 약 400m의 불과한 소규모로 성곽 내부는 좁은 면적이지만 취락이 형성될 수 있는 정도의 넓이는 되는,

봉무토성(鳳舞土城)이 있으며 삼국시대에 축성이 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봉무정 앞에는,

아래로 내려갈수 있겠금 나무계단이 되어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보니,

바위가 흘러 내리는것을 막으려 함인지,

돌로 고임을 해둔데다 굵은 와이어로 묶어두었습니다.

독좌암 이라는 바위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벌인 팔공산 파군재전투 등에서 왕건이 대패함으로,

동수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생명이 위태로울때 신숭겸 장군의 지략과 충성덕분에,

무사히 탈출하여 도망가다가 잠시 혼자 앉았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바위 입니다.

 

 

 

 

"독지바우"라고 하며 "왕바위"로도 불리는 독좌암은,

풍화에 약한 재질의 석재로 보이는데 와이어로 묶어 둔다는게 안타깝습니다.

 

 

 

 

봉무정(鳳舞亭)입니다.

달성 지역의 토호인 최상룡(崔象龍, 1786~1849)이 문회(文會)를 위해서 건립한 정자로,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뜻이 담긴 공공 건축물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다른 자료에서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봉촌 최상룡(崔象龍, 1786~1849)이 만년(晩年)에 여러 벗들과 어울려,

학문을 강론하고, 예(禮)를 익히며, 투호놀이 등 여가를 즐기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면서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향약(鄕約)을 통해 마을의 풍속을 바로 잡으려고 지었으며’ 이 때 오동나무와 대도 심었다고 한다.

회화나무 역시 이 때 심은 것이 같다.> 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봉촌 최상룡(崔象龍, 1786~1849)은,

1822년(순조 22)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그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며,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배우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독암서당(獨巖書堂)을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한 때 대구지방 생원 · 진사출신들의 친목 장소인 사마소(司馬所)가 관리소홀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앞장서서 이를 보수하고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논밭을 마련하는데도 크게 기여해,

지역 유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봉촌(鳳邨) 최상룡은 퇴계-김성일(학봉)-장흥효(경당)-이현일(갈암)-이재(밀암)-이상정(대산)-정종로(입재)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학자로 <사자변의(四子辨疑)>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앞면 7칸, 옆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은 우물마루가 깔린 대청이고, 왼쪽과 오른쪽의 각각 1칸은 온돌방인데,

천장에는 위를 가려 막은 고미반자를 설치하였습니다.

온돌방의 앞면에는 대청보다 높은 툇마루를 두었고,

툇마루 아래에는 아궁이를 설치하였으며, 대청의 뒷면에는 판문을 두었습니다.

공포를 쓰지 않은 민도리집으로, 5개의 도리로 지붕의 가구를 구성한 구조 입니다.

 

 

 

 

맞배 지붕의,

왼쪽과 오른쪽의 마지막 칸에는,

밖으로 기울어진 부섭지붕을 달았는데,

구조를 보면 짐작 되듯이,

건물 본채의 구조와는 분리되어서 뒤에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봉무정의 현판 입니다.

 

 

 

 

마루 안쪽에는,

다른 글씨체의 또하나의 봉무정 현판이 걸려 있으며,

 

 

 

 

대청에는 많은 기문이 걸려 있습니다.

「봉무정기」와 상량문을 비롯하여「봉서대기(鳳棲臺記)」등의 여러 기문이 있으며,

 

 

 

 

동성편 양재는 선생이 만든 종약(宗約)과 동규(洞規)의 실시 상황 등,

모든 동네 일에 대하여 동민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이고,

중앙강당은 동규를 가르치거나 각지에서 모인 여러 선비들이 사우회(士友會)를 열고,

시문과 풍악으로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건물의 동쪽과 북쪽에 대문이 있고 화강석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납도리 5량가로,

정면 13.2m, 측면 4.8m, 높이는 5m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내림지붕을 달아내었고,

건물 정면의 중앙 3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을 우물마루로 깔고, 양 협간 앞쪽으로 반칸의 툇마루를,

그 뒤쪽에는 온돌방을 대칭으로 각각 배치하였다.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기둥 상부의 결구구조도 살펴봅니다.

 

 

 

 

최상룡이 쓴「봉무정기(鳳舞亭記)」에,

온돌방을 ‘협(夾)’이라고 불렀고 서편에는 예용재(禮用齋)란 이름의 방으로,

동편에 있는 방은 덕교재(德敎齋)라고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서편에 있는 예용재(禮用齋)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뒤편에는 작은 다락이 올려져 있으며 관리를 잘해둔 모습입니다.

 

 

 

 

대청 마루에서 바깓을 내다 봅니다.

예전 같으면 봉무동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을텐데,

도시화의 영향으로 고층 아파트의 군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봉무점의 담장밖에,

봉촌 최상룡이 봉무정을 짓고 심은 것으로 추정이되는 회화나무 가 있습니다.

 

 

 

 

뒤편에도 시원한 바람을 맞을,

커다란 문과 작은 마루가 나와 있습니다.

 

 

 

 

불을들인 흔적이 아궁이에 남아 있구요,

 

 

 

 

정자를 나와 도시화에 묻혀가는 주변을 봅니다.

 

 

 

 

봉촌 최상룡이 봉무정을 지었고,

그겯의 회화나무는 시련을 견디며 봉무정을 지키고 서있습니다.

생활의 풍족함을 위해서 개발은 어쩔수 없는일 이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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