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밀양시 용평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별서(別墅) 건축인 "월연정(月淵亭)"입니다.
월연정(月淵亭)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지정 되었으며,
최근에는 명승 제87호로도 지정 되었습니다.
월연정은 용평터널 입구에 있는 작은 공터에 차량을 두고,
밀양강변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데,
가는 도중에 밀양강가에는,
이태(李迨)가 이곳에 머물며 낚시 하였다는 작은 바위가 있고,
길 윗쪽으로는 오죽(烏竹)의 군락이 있어,
오죽(烏竹)은 줄기의 색이 처음에는 초록색이나 차츰 검정으로 변하는 대나무 입니다.
이곳에 월연정(月淵亭)이라는 별서를 창건한 것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이태(李迨)가 기묘사화를 피해 귀향한 다음해인,
1520년(중종 15)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태(李迨)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조(趙光祖) 파가 죽음을 당하는기묘사화(己卯士禍)가,
1519년에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 왔다고 합니다.
이태(李迨)는 쌍경당과 월연대 등 주건물을 세웠는데,
그중 쌍경당으로 평면을 보면 남측으로 대청 2칸을 통간으로 두고 그 우측에 온돌방 2칸을 배설 하였고,
특히 온돌방과 대청 사이에는 사분합문을 두어 주위 경관을 조망하기 좋게 평면을 구성 했으며,
대청의 우측 1칸은 둘로 나누어 앞쪽에는 방을 뒤쪽에는 아궁이를 두었고,
중앙의 전면에는 쌍경당(雙鏡堂)의 현판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익공계 팔작지붕 건물로,
월연정의 대청인 쌍경당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영조 33년(1757)에 월암 이지복이 중건하였고,
쌍경당에는 문을 달아 열면 주위 경관을 볼 수 있게 했으며,
방, 아궁이를 설치해 4계절 두루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쌍경당 마루에서의 풍광으로,
단장천과 밀양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데,
쌍경당의 전면은 담장을 두르지 않아,
정면으로 밀양강 일원이 내려다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쌍경당을 나와 고직사로 보이는 관리사의 마당을 지나면,
바위옆에 협문이 있어,
협문을 지나면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규모로,
왼쪽부터 대청과 방을 연이어 들이고 2칸대청이 배설된 제헌(霽軒)이 자리하고 있어,
제헌(霽軒)은 고종 3년(1866)에 이종상과 이종증이 월연대를 보수하고,
그 당시에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작은 개천을 건너면,
가장 북측의 높은 언덕에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월연대(月淵臺)가 있어,
월연정은 쌍청당과 제헌 그리고 월연대 등의 건물군과,
수려한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별서로 평가되고 있는데,
특히 지형에 맞추어 각기 다른 평면을 지닌 건물과 주위에,
희귀한 나무와 꽃 그리고 수석(水石) 등이 아름답게 배치된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조영한 별서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월연대은 본래 월영사(月影寺)가 있던 곳으로,
밀양강가 월영연(月影淵)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월연대 아랫쪽에 있는 바위에는,
월연정(月淵亭)을 세운 이태(李迨)와 관련한 암각서가 있고,
일각문을 통하여 월연대(月淵臺)로 들어가 봅니다.
월연대(月淵臺)는 정방형에 가까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자의 기능을 지닌 건물로,
월연대(月淵臺)의 현판이며,
월연대(月淵臺)는 가운데 방을 두고 주위를 돌아가며 마루를 시설하여 호남식 정자의 유형을 보여 주는데,
평면의 가운데 칸에 방을 두고 네 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아 정자의 기능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온돌방의 모습으로,
사방으로 들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방에서의 개방성을 더 하였고,
방의 천정은 고식인 우물천정으로 마감 하였습니다.
월연대(月淵臺)의 마루위에는 여러기의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편액이 올려져 있는데,
일부는 새들로 부터의 보호 때문인지 그물망을 쳐두어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월연정(月淵亭)을 세운 이태(李迨,1483~1536)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중예(仲豫), 호는 월연(月淵)으로,
1507년(중종 2)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10년 식년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1512년 봉교로 재직중 모친의 병을 거짓 칭탁하고 사직하고,
창기(娼妓)와 함께 하향한 것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1519년 함경도 도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 하였다가,
뒤에 등용되어 1532년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탐학죄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된 뒤 향리에 은퇴 하였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습니다.
일찍이 한원(翰苑)에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병풍에 휘호하기를 요청했는데 이를 거절 하였으므로 여러 모함을 받았으며,
김정국(金正國)·이현보(李賢輔)·권벌(權橃)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가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월연집(月淵集)"이 있습니다.
"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 중 하나인 "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키는 것이며,
명승에 들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며,
경남 밀양을 대표하는 별서(別墅) 정원으로 "월연정(月淵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