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단 하루만 산사의 문을 열어주는 사찰인,

경북 문경의 고찰인 "봉암사(鳳巖寺)"을 소개 합니다.

참고로 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가 오랫동안 우리곁에 있어 왔기에,

역사가 있는 사찰에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많이 있기에,

문화재 탐방을 즐겨하고 있으며,

아늑한 산사의 분위기를 좋아 하기에 사찰이야기를 올려 봅니다.

 

문경 봉암사(鳳巖寺)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의 승려 지선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입니다.

 

 

 

 

일년에 단하루,

부처님 오신날에만 개방을 하기에,

봉암사(鳳巖寺)를 찾으시려면 가급적 서두르시는게 좋고,

주차장에서 금당 까지는 약 1km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지금이야 금당 바로 아래까지 차량이 들어가는 사찰이 많지만,

옛날에는 사찰을 찾으면 한참을 걸어야 했었는데,

봉암사 역시 옛날 방식으로 조금은 걸어야 하지만 나름 운치가 있으며,  

 

 

 

 

산책하듯 얼마간 걷다보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1호로 지정된,

"문경 봉암사 일주문 (聞慶 鳳巖寺 一柱門)"을 만나게 되는데,

 

 

 

 

봉암사의 일주문은 흔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이곳의 목조 건축물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소급될 수 있는 것으로,

특유의 건축적 특징에 따라 설치하는 받침 시설의 고졸한 모습이 돋보입니다.

 

 

 

 

마침내 계곡인 영산천을 건너는 다리가 보이면,

봉암사(鳳巖寺)의 경내에 이르렀슴을 알게 되는데,

 

 

 

 

다리를 건너면,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누각으로,

강당의 역활를 하는 누각인 남훈루(南薰樓)를 만나게 됩니다.

 

 

 

 

봉암사(鳳巖寺)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증국사(智證國師) "지선(智詵)"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로,


창건 당시 "지선(智詵)"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훈루(南薰樓)를 지나 금당 앞의 너른 마당에 들어서면,

한쪽에서는 큰 규모의 "노주석(露柱石)"을 만나게 되는데,

노주석은 사찰에서 야간에 법회 등의 행사때 주위를 밝히는 석등의 일종으로,

석등보다 선행되는 형식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노주석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조선시대의 몇몇 예가 문경의 김용사를 비롯하여 영남지역에 일부 남아 있는 석물로,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 이기도 합니다.

 

 

 

 

마당 위에는 봉암사(鳳巖寺)의 중심 건물이며,

부처님을 모신 금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자리해 있어,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목조 건축물로는 아주 큰 규모인데,

건물의 양식으로 보아 세운지 그리 오래지 않아 보이며,

 

 

 

 

대웅전 앞에는 많은 이들이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는데,

 

 

 

 

대웅보전 앞에 마련된 아기부처에게,

참배객들이 관욕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며,

 

 

 

 

대웅전 마당에는,

부처님 오신날의 행사로 준비에 바쁜 모습입니다.

 

 

 

 

대웅전(大雄殿)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인 삼세불을 모신 전각으로,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하며,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모시고, 

다시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대웅(大雄)은 마하비라(Mahavira)를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많은 존칭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이라 할수 있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1574호인 "문경 봉암사 극락전(聞慶 鳳巖寺 極樂殿)"이 자리해 있어,

극락전(極樂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사모지붕으로,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현재 전하는 몇 안 되는 목탑(木塔)중 하나이며,

일주문과 더불어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건물의 공포(栱包)는 내외2출목(出目)의 다포(多包)로 구성하였으며,

살미첨차는 바깥쪽은 짧지만치켜 올라간 모습이 힘이 넘치는 앙서[仰舌]형이고,

안쪽은 끝부분이 둥글게 깎인 교두(翹頭)형으로,

지붕은 각서까래[角椽] 홑처마로 이루어진 1층 지붕 위에 처마의 곡선이,

늘씬한 겹처마의 2층 지붕을 모임지붕으로 만들었는데,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사모지붕의 꼭대기에는 석탑의 상륜(相輪)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어,

탑의 요소를 두루 갖추게 하여 특이하며,

 

 

 

 

극락전(極樂殿)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는데,

서방극락정토와 관련하여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봉안하는 전각으로,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님 입니다.

 

 

 

 

뒤편에는 아담한 규모의 산신각(山神閣)이 자리해 있어,

산신각(山神閣) 사찰에서 산신을 봉안하는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예 이며,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畵)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하는데,

산신신앙은 불전(佛典)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웅전 마당의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2기의 석물을 보관하는 용도인 비각이 자리해 있어,

비각에는 봉암사(鳳巖寺)를 세운 지증대사(智證大師)를 기리는 석물들이 있어,

 

 

 

 

보물 제137호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이며,


신라 후기의 고승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이며,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는데,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며,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고,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며,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지붕돌 역시 8각으로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며,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고,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으며,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 지는데,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고,

탑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리탑 곁에는,

국보 제315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가 자리해 있어,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인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와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 온 것이라 하며,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 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며,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 육시(六是)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라 합니다.

 

 

 

 

 

비각 한쪽에는 또 하나의 전각이 자리해 있어,

 1955년이후 새로 건립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조사전(祖師殿)으로,

 

 

 

 

조사전(祖師殿)에는,

봉암사에서 주석 하셨던 이름난 고승들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며,

 

 

 

 

길게 담장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는 큰 건물이 있어,

수행의 공간인 "선원"으로,

 

 

 

 

부처님 탄신일에도 문이 닫혀있는 이곳은,

수행을 위한 스님들의 거처인 승방으로 수행하는 스님을 볼수도 있습니다.

 

 

 

 

선원 앞쪽에는 금색전(金色殿)과 마당에는 3층 석탑이 자리해 있어,

 

 

 

 

보물 제169호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聞慶 鳳巖寺 三層石塔)으로,

높이 6.31m.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두고 상륜부(相輪部)를 완전히 갖춘 모습으로,

특히 단층 받침돌은 주변 지역에 있는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 하대에 이르러 변화하였던 과정을 짐작하게 하며,

석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는데,

앞면과 옆면에 각각 2구와 1구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으며,

 

 

 

 

기단은 넓은 지대석 위에 있는 1단 굄이 기단을 받치고 있는데,

기단의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가 새겨져 있고,

갑석 밑에는 부연이, 윗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2단 굄이 있으며,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올렸으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 되었고,

지붕돌의 추녀 밑은 직선이지만 낙수면의 전각(轉角)에 이르러서는 반전(反轉)을 이루고 있는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2층이 5단이고, 3층은 4단으로 줄어 들었습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철간(鐵竿)이 관통하면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륜부가 자리하고 있는데,

 

 

 

 

사찰의 역사를 전해주는 "봉암사사적기"에 의하면,

879년(헌강왕 5)에 지증도헌(智證道憲, 824~882)이 개산(開山)한 뒤,

881년에 왕실에서 봉암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하였으므로,

석탑은 이 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층석탑 윗쪽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의 금색전(金色殿)이 자리하고 있는데,

 

 

 

 

전각의 정면에 보이는 현판은 "금색전(金色殿)"으로 되어 있으나,

 

 

 

 

전각의 후면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현판으로,

대웅전(大雄殿)으로 되어 있어,

예전에는 이곳이 봉암사(鳳巖寺)의 주불전이었던 곳으로 여겨지며,

 

 

 

 

금색전(金色殿)에는 수인으로 보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일반 사찰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보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화엄전(華嚴殿)으로 칭하는데,

이 또한, 봉암사의 특징인듯 합니다.

 

 

 

 

경내에서 나와,

계곡을 따라 오르며,

봄날의 백운대(白雲臺)를 보기위해 오솔길을 택합니다.

 

 

 

 

경내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백운대(白雲臺)는,

일명 옥석대(玉石臺)라고도 하는곳으로,

 

 

 

 

이곳에서는 보물 제2108호인,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聞慶 鳳巖寺 磨崖彌勒如來坐像)"을 만날수 있어,

마애불은 절벽의 거대한 바위면이나 돌에 선이나 돋을새김 기법 등으로 조각한 불상을 말하는데,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으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어,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으며,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고,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어,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운대(白雲臺)의 마애불 앞쪽에는,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곳으로,

바위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듣기위해 바위를 두드려 보는 이도 있습니다.

 

 

 

 

봉암사를 찾으시면,

문경 팔경중 하나라는 백운대(白雲臺)는,

봉암사 탐방에서 빼놓을수 없는 곳들 중 하나입니다.

 

 

 

 

백운대에서 내려와 경내를 지나다 보니,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신도님들께서,

봉암사를 찾은 이들에게 주먹밥과 흰떡을 나눔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부처님 오신날에 찾아 보았던 곳으로,

경북 문경의 고찰이며 선승의 도량으로,

해방 뒤인 1947년에,

청담, 성철, 자운 등의 승려들이 모여 "부처님 뜻대로 살자"며 "봉암사 결사"를 일으킨 뒤,

1년중 4월 초파일 단 하루에만 개방을 하며,

그 외의 기간에는 승려들의 선승도량으로써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곳여서,

"부처님 오신날"에만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고 있는 사찰로,

당일에만 10여명의 방문객이 찾는 사찰인,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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