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여행에서 찾은곳은,

경북 영천시 대전동의 양계정사입니다.

 

양계정사를 찾기위해서,

자동차의 네비에 의존을 했으나,

목적지위의 새로난 도로로 인해서 주변을 한바퀴 돌고 나서야 찾을수가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양계(暘溪)정호인(鄭好仁)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사로 양계정사(陽溪精舍) 이 정자의 주인은 조선중기의 학자인 정호인(鄭好仁)입니다.

정호인은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을 지낸 호수(湖垂) 정세아(鄭世雅)의 손자이며,

그는 인조 5년(16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과 호조 정랑 등을 거쳐 양산 군수와 합천 군수가 되었고,

진주 목사와 남원 도호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진주목사 임기가 마칠 때에도 향리로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임명 교지가 내려져 교체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치 않았고,

조선에서 관리로 백성들을 다스리기 가장 힘이드는 호남 남원을 다스려 달라는 임금의 命으로,

남원도호부사 직을 수행함에 당시 삐틀어진 남원 선비들을 잘 관찰하여 어루만지니,

그 지방의 선비들과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니,上은 과연 鄭춘추관이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 하여,

공이 늙고 병들어 그만 불러남을 청하였으나, 허락치 않으며..

공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공과 같이 다스릴 자가 없다 하여 향리에 돌아오질 못 하고,

고향의 향수를 그리워 하다가 그만 병이 악화되어 남원관사에서 1655년에 순직하였다고 합니다.

 

 

 

 

양계정사 아래에는,

향나무인듯 나무 한그루가 푸르른 몸으로 서있고,

 

 

 

 

정사의 기단부는 자연석 돌을 쌓아 두었는데,

기존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 보입니다.

 

 

 

 

원래에 있던 크고작은 바위와,

가져와 쌓은 돌이 적절하게 사용이된 자연석 기단부의 모습입니다.

 

 

 

 

양계정사로 들어서면,

가장먼저 만나게 되는것은 왼쪽에 있는 작은 화장실입니다.

 

 

 

 

이어서 정사의 부속건물인듯한 건물이 자리해있습니다.

 

 

 

 

양계정사는 3량가의 민도리집인데,

창틀 곳곳에는 가운데설주를 세웠던 홈구멍이 남아 있어서,

앞쪽의 건물이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정사의 맨뒤쪽 건물인 관리사 인듯한 곳의 부엌입니다.

 

 

 

 

之자형으로 되어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배치에서 뒷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반대쪽으로 통하는 작은문과 창고가 배치되어 있으며,

 

 

 

 

작은 문을 통하면,

정사의 뒷마당으로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양계정사는 원래,

가운데 2칸 대청과 좌·우측에 온돌방을 둔 'ㅡ'자형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좌측 온돌방 뒤쪽으로 한 칸의 방과 중문간채를 증축하여 'ㄴ'자형이 되었다.

양계정사는 ㄴ자형의 정사와 일자형(一字形)의 관리사로 이루어져 있다.

정사는 원래 2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일자형 건물이었으나,

후대에 좌측 온돌방 뒤에 온돌방, 마루방, 중문간을 달아내어 ㄴ자형이 되었다.

조선후기의 之자형의 특이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이해를 돕기위해 가져왔습니다)

 

 

 

 

양계정사 입니다.

중앙에 마루를두고 양쪽으로 온돌방을둔 구조입니다.

 

 

 

양계정사(暘溪精舍)의 현판입니다.

 

 

 

 

마루에는 또다른 현판과 함께 많은 글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왼쪽의 글내용 입니다.

양계13대손 "정극"은 손을 씻고 공경하게 題하다,

(양계선생의 주손으로, 훈수선생의 종손이다)

창건한지 지금에 몇 백년이 되었던고

중수한 후 이날에는 감회 더욱 새롭구나

능히 선조님의 업적을 계승하오니 집안 대대로 효도 전했으며

현사에게 바로 배워 참된 것을 체득 했네

끼치신 덕은 천추토록 칭송함이 자자하고

높은 공훈 만세토록 천양함을 자주 하네

원하옵건데 우리 후손 아름다운 법도 이어서

양계정사 길이 보존하여 상서운수 펼치소서..

 

 

 

 

2014년도 영천 초등부 글 짓기에서 출품한 詩입니다.

 

 

 

 

마루에서 왼쪽방의 문이 열려 있어서,

 

 

 

 

방의 내부도 들여다 봅니다.

두개의 방이 연결이 되어있으며,

 

 

 

 

정사의 방에서는,

대극기가 걸려있고 모임이나 회합이 있었나봅니다.

 

 

미(美) 속풍속의 자리로 제공했던 양계정사에는,

아주 옛날부터 음력2월1일 이면,남자들과 부녀자 들은 척사대회를 이 마을에는 열어 주었고,

새 며느리들은 이 마실 鄭家 청년 딸래가 푸짐하게 시장을 보아,

부엌에서 장작불로 이용하여 음식을 잘 차려서 하루 온종일 새 며느리들을 편히 쉬게하여 먹이며,

놀이로는 윳놀이를 하게하여 상품도 푸짐하게 안겨 주었고,

이날 하루 만큼은 머슴들도 따로 초당집에서 술과 안주를 풍족히 하여 놀려주기도 했던 풍속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사의 마루에서 고현천을 내려다 봅니다.

 

 

 

 

앞쪽으로 흐르는 고현천은 예전과 변함없이 그대로 흐릅니다.

하지만 옆으로는 산의 능선을 가로질러 28번 국도가 바싹 붙어서 교각위로 지나갑니다.

 

 

 

 

 

굴레가 많았던 조선시대에,

미(美) 속풍속의 자리로 제공했던 양계정사의 의미를 돌아보았습니다.

호수종택도 아주 가까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시면 좋을듯합니다.

영천의 양계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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