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의 "양계정사"를 돌아 보셨다면,

반드시 들러야할 곳이 있으니 "호수종택" 입니다.

두곳의 거리가 1km 남짓한 거리이니 반드시 들러야 하는곳 입니다.

 

호수종택 앞에서 차를 세우면,

왼쪽으로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늠름하게 서있는 영천시 보호수인 400여년 수령의 향나무 입니다.

 

 

 

 

호수 종택의 사랑채 입니다.

이곳은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장손인 정호례(鄭好禮)가,

해남현감을 지낼 때인 광해군5년(1613)에 자손들의 훈도를 위하여 工자형 살림집으로 2채로 세웠다고 전하나,

이 건물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광해군 5년(1613년)이란 설명이 여러곳에 있으나,

따져보면 정호례의 나이가 이때에는 불과 10살이니 믿기 어렵고,

조성 연대가 인조 21년(1643년)이란 또다른 설명이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호수종택의 전체 조감도 입니다.

호수종택(湖垂宗宅)은 처음 얼핏 보면 매산종택의 겉모습과 비슷합니다.

마치 성벽처럼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앞면의 모습은,

마치 매산종택처럼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수종택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工'자형 가옥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工'자형 가옥구조가 드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한옥의 평면의 형태를 주로,

구(口)자형·월(月)자형·일(一)자형·용(用)자형 등 길상형을 하였고,

불길한 의미가 있는 시(尸)자형과 공(工)자형 등은 되도록 피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가져온 그림입니다.)

 

 

 

 

사랑채에 걸린 호수종택의 현판입니다.

정호례[1604-1672]의 자는 자립(子立), 호는 요산(樂山)이며,

1636년(인조 14)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습니다.

이듬해 봄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와 상제(喪制)를 마치고 선전관(宣傳官)으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1641년에 부장(部將)을 제수 받고, 1644년에 부사과(副司果)에 올랐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돌아왔으며,

1659년(효종 10)에 선전관(宣傳官)을 제수 받고, 주부(主簿)로 옮겼다가,

다시 해남 현감으로 전출되었으나 1661년에 사직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평생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으며, 당시 해남고을에 세운 선정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호례는,

임진왜란(1592) 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 침입한 왜병을 격퇴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운,

의병장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장손입니다.

 

 

 

 

 

사랑채의 왼쪽으로 보이는 대청입니다.

 

 

 

 

 

 대청에 앉으면,

고현천을 중심에 두고 양쪽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주춧돌은 멀리서 구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석재의 재질로 보아 가까운곳의 자연석을 어느정도 다듬어 사용한 모습입니다.

 

 

 

 

대청으로 오르는 발디딤돌과 주춧돌도,

역시 자연석을 최대한 이용한 모습입니다.

 

 

 

 

사랑채옆의 문으로 들어서면,

한눈에 안채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일반적으로 안채는 한옥에서 가장 은밀한 곳에 있으며,

사랑채보다는 장식적인 화려함에는 좀 떨어지지만 가옥구조상에 있어서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는 겉모습을 좀 더 중시하는 사랑채에 비해 내실을 더 중요시하는 안채의 역할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안채는 사랑채보다 한 단 더 높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채로 들어서면,

문안 오른쪽에 부엌이 자리해 있습니다.

2층의 구조처럼 윗쪽에도 큰문이 나있어서,

부엌 위의 다락과 같은 창고의 용도인듯 합니다.

 

 

 

 

 종가답게 옛날집 임에도 부엌이 아주 넓습니다.

 

 

 

 

 

안채의 구조를 살펴봅니다.

대문이 중심부에 있고 향좌측에 2칸 외양간, 사랑방 2칸, 2칸대청이 있고,

우측으로 곳간, 창고 방이 연속된다. 곳간에서 북쪽으로 꺾이면서 2칸 부엌이고 다음이 방 2칸이다.

다음이 목욕칸이다. 목욕칸 우측에 다시 1칸의 마루가 있다.

목욕탕과 안방 좌측으로부터 4칸대청 다음에 상방이 있는데 앞퇴마루가 자리잡았다. 뒤로 반반칸의 반침이다.

(복잡하게 설명이된 구조에 대한글 입니다.)

 

 

 

 

 양쪽으로 방을둔 안채의 대청마루 입니다.

종택을 관리 하시는분이 시레기를 말리려둔 모습이 사람이 기거하는곳으로 여겨지게 합니다.

 

 

 

 

마루의 왼쪽에 있는방 입니다.

주인 마님이나 며느리가 기거 했슴직한 곳으로,

방뒤에 작은 벽장이 있으며 아주 큰편은 아니지만 옛날집 치고는 결코 작은 크기의 방은 아닙니다.

 

 

 

 

평면도를 보지 않고는 얼른 이해되기 어려운 이런 구조라서,

앞서서 평면도를 가져와 보여 드렸었는데..

이러한 구조는 관공서의 관해(官廨)나 사찰의 요사채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살림집에 도입한 것은 대담한 생각 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집은 5량집이며 구조는 매우 질박합니다.

그러면서도 대청에 앞뒤로 퇴칸을 둔다던지 하는 구조로 격조 높이는데 애를 쓴 모습입니다. 

 

 

 

 

안채의 마루 오른쪽의 방이 3칸방으로 가장 넓습니다.

부엌과는 작은 방문으로 통하는 이 방은 안채 주인이 쓰던 방으로 추측됩니다.

부엌 창살 위로 문이 한 짝 열려 있는 곳은 안방에 딸린 다락으로,

생각보다는 꽤 넓은 데 이곳에 살림살이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보관하였을 것입니다.

 

 

 

 

안채의 후면도 돌아봅니다.

 

 

 

 

대문간채-안채-사랑채-사당채가 경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문간채,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계되어 있는 점이 이 집의 특색입니다.

대문 바라다 보고 서면 일렬로 10칸이나 되는 건물이 우뚝해서 우람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사람은 살지 않지만,

개방이 되어 있어서 호수종택의 이곳저곳을 살펴 볼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랑채의 끝부분에 있는 작은문을 나서면

건물 북쪽에 "정세아"의 위패를 모신 "환고사"가 있습니다.

임고면 선원리에 후손들이 아버지 정의번과 아들 정호례를 추모하여 세운 충이당(忠怡堂)이 있다고 합니다.

 

 

 

 

흙담장 사이에있는 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환고사 입니다.

사당은 정면3칸, 측면1칸 규모로,

사주문으로 출입할 수 있는 일곽을 낮은 담장으로 둘렀습니다.

안채 주변에도 담장이 있는데 ’93,94년도에 국비를 들여 담장보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위패를 모신 "환고사"입니다.

호수종택에서 유일하게 문이 잠궈져 있는곳이기도 합니다.

 

 

 

 

들어 올때엔 많았던 나뭇가지로 인해 나무의 모습을 제대로 볼수가 없었는데,

환고사에서 내려오면서 향나무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옵니다. 

 

 

 

 

독특한 고택의 구조와,

사랑채보다 높게 자리한 안채등..

조선시대의 통상적인 이념을 벗어난,

특이한 구조의 "호수종택"을 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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