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에 경주를 여행하면서 찾은곳은,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흥덕왕릉" 입니다.

 

경주시내와 가까운 왕릉이나 유적지와는 달리,

외곽지에 위치해서 인지 주차장의 규모나 입구의 형식이 여유롭습니다.

 

 

 

 

흥덕왕릉으로 들어오는길에,

만나게되는 소나무의 군락입니다.

왕릉도 있어서 좋지만,

이곳의 소나무숲을 한가롭게 거닐어 보는것이,

가장 특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무덤인 흥덕왕릉(興德王陵) 입니다.

흥덕왕은 신라의 역대왕들중 잘알려 지지 않았으나,

헌덕왕의 아우로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秀宗)입니다.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 하였으며,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 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를 들여와서 지리산에 재배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왕릉의 앞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 ·무인석의 배치는 33대 성덕왕릉이나 38대인 원성왕릉의 형식과 같으며..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클뿐 아니라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 왕릉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비와 합장한 것으로 되어 있어,

봉분(封墳)의 규모가 비교적 큰편에 속합니다.

 

 

 

 

지름 20.8m, 높이 6m의 능으로,

전형적인 풍수지리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능의 주변에서 ‘興德’이라 새겨진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어 능의 주인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사면에 배치된 돌사자의 모습으로,

돌사자의 배치는 신라 33대왕인 성덕왕릉의 형식과 같습니다.

 

 

 

 

봉분 밑에는 판석(板石)을 세워 둘레돌[護石]을 삼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탱주(伸)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였으며,

위에 갑석(甲石)을 얹었고 탱석에 각각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습니다.

둘레돌의 주변에 방사형으로 박석을 깔고, 그 주위에 난간을 돌렸습니다.

난간 기둥에는 상·하 2개의 둥근 구멍을 뚫어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관석을 끼웠던 흔적은 보이나 관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덤의 둘레에 조성이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중 하나입니다.

 

 

 

 

앞면에 있는 두개의 돌사자는,

서로 마주하듯 서있었는데 능의 뒤편의 돌사자는,

능의 바깥쪽을 바라보며 후방을 지키는듯 서있습니다.

 

 

 

 

능에서 소나무 군락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곳에서 보이는 거북이 모양의 귀부입니다.

능비를 세웠던 귀부(龜趺)는 남아 있으나 손상되었으며,

비의 몸체와 상부에 해당하는 비신(碑身)과 이수(首)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소나무숲을 거닐며 흥덕왕릉을 나옵니다.

 

부인인 장화부인의 사후에,

왕은 아내를 잊지못하고 슬퍼하자 군신들이 재혼할것을 청하였으나,

"척조(隻鳥)가 짝을 잃어도 슬퍼하는데 어찌 사람이 짝을 잃었다고 곧 다시 아내를 맞겠느냐"

라고 하면서 시중드는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흥덕왕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있는,

경주 안강읍의 흥덕왕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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