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는,

옛도읍지와 유구한 역사로,

유명 유적지와 관광지가 산재해 있어 가볼곳이 많은곳입니다.

 

우리의 옛것을 좋아하고 선비문화를 즐기고 싶다면 양동 마을과 함께,

호젓하게 다녀올수 있는곳으로 경주 안강의 독락당(獨樂堂)을 추천합니다.

 

독락당은 안강읍에서 6km 남짓의 거리로,

약 15분이내의 시간이면 찾을수가 있습니다.

독락당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인 외삼문은 보수공사중 입니다.

 

 

외삼문으로된 솟을대문은,

조선시대 말기에 유행하던 양식으로 나중에 후손이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지않은 마당에,

오른편으로 문이 보이고 공수간이 있습니다.

 

 

 

 

공수간(供需間)은 별채라는 표지와 함께 문이 닫혀있습니다.

 

공수간이란 원래 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곳인 부엌으로,

독락당의 공수간이란 하인들의 거처를 위한 용도였으며,

현재의 신식 기와지붕은 원래 한식 기와지붕이었다가 초가지붕으로 된것을,

보수공사하면서 바꾸어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거주를하고 있는 후손의 사적인 공간으로 쓰고 있는듯 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서,

독락당 고택의 배치도를 열어봅니다.

이곳은 크고작은 건물이 담장으로 독립된 공간으로 되어있어서,

미리 이해를 하지 않고 들어가면 미로와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외삼문에서 우측의 공수간을 지나면,

가장 먼저 만나게되는곳은 경청재 입니다.

 

 

이건물은 1601년(선조34년) 회재 이언적 선생의 "준"과 "순" 두 손자가,

회재 선생의 무고(역모사건)를 밝히고 위폐를 모신 옥산서원을 세울 때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지은 건물로,

청백은 공경지심 (恭敬之心) 에서 나온다 하여 경청재(敬淸齋)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1900년대 이후엔 마름들이 거처하기도 했으며,

청백리에 오른 회재에게 공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의 손자들이 지은 경청재 건물에는,

현재 숙박이 가능한 방 1개, 현대식 욕실,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경청재(敬淸齋)의 현판입니다.

마당 앞에 위치하고 있는 경청재는 행랑채로 쓰이던 건물로,

좌우로 길게 지어진 탓인지 가뜩이나 낮은 지붕이 더욱 낮아 보입니다.

기단 위에 올라서 손을 뻗으면 처마가 바로 손에 닿을 정도 입니다.

 

 

 

 

 

경청재의 열린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막다른 골목에 와있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앞은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좌우로 세군데로 갈수있는,

문과 통로가 있어서 마치 교차로를 연상케 합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들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한것은,

문을 통하여 들어오면 내당쪽이 바로 들여다 볼수 없도록 배려를 해둔 구조로 보입니다.

 

 

 

 

오른쪽으로 나있는 길지 않은 담장길은,

계정의 바깥쪽을 볼수있는 오산천의 계곡으로 나가는곳입니다.

황토와 기와, 돌을 이용해 쌓아올린 담장과 함께한 향나무가 비스듬히 서있으며,

담장 너머의 천연기념물 제115호인 조각자 나무와 흙길이 어우러져 독락당의 또 다른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경청재 안쪽과 마주하고 있는 곳은

안사랑 남쪽 바깥벽의 역락재(亦樂齋)입니다.

역락재는 안채를 가로 막는듯 서있는데,

역락재부터 '口'자 형태를 이루는 안채는 종손 내외가 거주하는 곳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역락재의 현판입니다.

계정의 현판과 더불어 한석봉의 글씨 입니다.

 

 

 

 

다녀온 후에야 알았지만,

역락재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있어서,

 

 

 

 

개방된 공간으로 알고서 안채로 들어가 봅니다.

 

 

 

 

사면이 건물로 빙둘러 막힌 口형으로된 안채의 구조입니다.

 

 

 

 

내당쪽의 모습으로,

주부(안방), 며느리(머리방), 할머니(안사랑), 아이(서녘방)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합니다.

안사랑과 빈소방은 전에는 결혼한 장남이 거처하는 작은 사랑의 방과 마루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당의 처마 아래에는,

북어 머리와 메주가 나란히 매달려 있습니다.

 

 

 

 

안채의 왼편에는,

다락형의 창고로 오를수있는 통나무 계단이 보이고,

또 다른곳으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크지 않은 작은문을 통해서 오른편으로는,

다시 마당이 보이고 또다른 독립된 공간이 있으며,

향나무와 약나무인 조각자나무(일명 :중국주엽나무)가 보이며,

이곳의 조각자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15로 지정이 되어있습니다.

 

 

 

 

보물 제413호 독락당(獨樂堂)입니다.

중종 27년(1532년) 불혹의 나이에,

김안로를 탄핵하다 밀려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난 이언적은,

태어나고 자랐으며, 본처가 있는 경주의 양동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둘째 부인이 사는 이곳을 택하여 왔습니다.

집성촌인 양동마을에 낙향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보이기 싫었던 연유로 보입니다.

 

 

당시 이곳에는,

둘째 부인이 지은 안채와 숨방채,

그리고 아버지가 지은 작은 정자가 있었습니다.

이언적은 사랑채인 독락당을 지으면서,

이곳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증축하여 중앙 정계로 복귀할 때까지 7년간을 살았습니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구조 입니다.

 

 

 

 

 

마루앞 처마 아래에는 "옥산정사"라는 현판이 있으며,

이현판은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고 합니다.

독락당은 이 고택의 사랑채를 이르는 말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합니다.

 

 

 

 

독락당의 편액은 마루의 안쪽에 있으며,

문장가 이며 서화와 서예에 뛰어났던 여수(汝受)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글씨로,

이산해는 명종의 명으로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으며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

 

 

 

 

이곳 독락당의 주인인,

"이언적 (李彦迪:1491∼1553)"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조선 중기 문신·학자.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본관은 여주(驪州).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장령, 밀양부사 등을 지냈다.

1531년 사간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경주(慶州)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연구에 전념했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종부시첨정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전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에 오르고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 강계(江界)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인 인물로,

조한보(曺漢輔)와 태극(太極)에 대한 논변을 벌임으로써 조선 성리학 논쟁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1517년 영남지방의 학자인 외숙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참여하여,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에서 두 사람의 견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저서로는 《구인록(求仁錄, 1550)》《대학장구보유(1549)》 《속대학혹문》《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義)》 《회재집》 등이 있다.

문묘와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 (文元)이다.

(참고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현재의 단청은 문화재 보수공사할 때(1976-1978)에 칠해진 것으로 전합니다.

 

 

 

 

독락당의 대청에서 볼수있는,

방문객들에 의한 시문, 기문이 써있는 15개의 현판들 입니다.

 

 

 

 

독락당의 구조를 살펴봅니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 입니다.

 

 

독락당의 건물들은 각각 담장으로 구획되며 독립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평면도를 보지 않고 돌아보면은 미로를 다니는듯한 느낌도 드는것이,

안채, 사랑채, 별채 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각각의 문을 열어야 하며,

따라서 더없이 아늑하고 조용해 낙향 후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스승 삼아 학문에 열중하고자한 회재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마음이 홀로 서야 이(理)가 생긴다'던 그의 말처럼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혼자가 아니라 "자신과 학문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선택한 혼자" 이니,

집 이름처럼 홀로 있으되 즐거움이 넘쳤을 것입니다.

 

 

 

 

 

 

독락당의 담장에 보이는 독특한 모습이 있습니다.

오곳을 지은 "이언적"은 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 집을 지은것이,

독락당을 돌아보면 집의 우측에 계곡이 있으며,

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난 담장에 흙 담이 아닌 나무로 만든 창이 있습니다.

 

 

창살도 나무로 만든 이 담 벽에 붙은 창은 무엇이었을까?

독락당의 대청에서 담장으 창을 통해 계곡을 바라다 볼수가 있으며,

시원한 계곡의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독락당의 건축미학이 이런 것에 있습니다.

계곡의 바람도 들어오고, 이 담 벽의 창으로 계곡의 경치까지 볼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담장을 세워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막았지만,

그래도 자연을 더욱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독락당" 이라는 이름 또한 '혼자 즐긴다'라는 뜻이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하고 있지만 이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좁은 창살 사이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한 것은,

"회재"의 절제된 학문수양 방식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창살 사이로 계곡이 보이게끔 한 것 또한 끊임없이 흐르는 물에서 쉼 없는 수양의 필요를 느끼고,

막힌 곳은 돌아가고, 고여있다가도 이내 흘러가는 물의 지혜를 배우고자 했으리라는 설명입니다.

 

 

 

 

 

 독락당의 우측 뒤로는 또다른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나있습니다.

독락당을 돌면서 가장 편하게 보이는 것은 흙담과 흙길로,

기와와 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고 쌓아올린 흙담은 투박하지만 흙담이 주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주인의 정자인 계정(溪亭)의 마당에서 북측으로 보이는 사당(社堂) 입니다.

잠계가 건립하여 회재의 신위를 봉안하였다가 1566년에 양동마을의 본가로 신위를 옮기게 되었고,

잠계 사후에 장자 이준(李浚)(1540-1623)에 의해 잠계의 신위를 봉안하고부터 사대봉사를 위한 신위를 봉안해 온 곳입니다.

 

 

 

 

독락당 뒤 약쑥밭을 지나 쪽문을 열면 드러나는 것이,

독락당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정자, 계정(양진암)입니다.

원래는 회재의 부친이 사용하던 세 칸짜리 초가였으나,

회재가 기와를 얹고 옆으로 두 칸을 더 달아 지금의 구조를 완성했으며,

안에서 보면 보이는것처럼 아주 평범한 모습입니다.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의 부속 건물로,

독락당을 건립한 이듬 해인 153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계정(溪亭)의 현판으로,

명필 석봉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입니다.

 

 

 

 

양진암(養眞庵)이란 현판입니다.

당시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가사상까지도 섭렵했던 회재가,

인근의 정혜사의 스님과 담론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스님을 위한 당호로 퇴계 이황의 글씨입니다.

 

 

 

 

계정의 마루에는 11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으며,

 

 

 

 

회재는 어린시절 이곳 계정에서 글을 읽었고,

정쟁에 밀려 낙향한 이후엔 바로 인근 정혜사의 승려와 함께 교류하며 학문과 사상을 나누었습니다.

 

 

 

 

방 1칸과 마루 2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루를 계곡쪽으로 내고 난간을 두른 간단한 구조이지만,

마루를 계곡쪽으로 들어내 계곡의 일부가 되어 버린 형태입니다.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도 있습니다.

계정(溪亭)의 현판과 함께 한석봉의 글씨로,

인지헌의 인(仁)과 지(智)는 회재선생의 구인(求仁)과,

논어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취한 것이라 합니다.

 

 

 

 

계정의 대청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자계(紫溪)라는 개울의 맑은물과,

 

 

 

 

자계천이 만들어낸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수가 있습니다.

 

 

 

 

회재는 독락당을 지으며,

주변의 산봉우리에 도덕산, 무학산,화개산, 자옥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계곡의 바위에도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징심대, 세심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4산5대로 구성된 계곡의 이름을 '자계'라했는데,

계정은 이 자계에 가깝다 못해 일부가 된 듯 보이는 곳입니다.

마당에서 보면 한 채의 낮은 건물이지만 마루 위에 올라서면,

짙푸른 산과 맑은 계곡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정자로 변하는게 계정의 묘미 입니다.

 

 

 

 

계정을 나와,

자계천으로 가기위해 독락당으로 다시 나옵니다.

 

 

 

 

독락당의 남쪽문을 열고 나오면,

경천재에서 들어왔던 처음의 장소로 나오게 되고,

우측의 담장길을 통해서 자계천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흙담장을 따라서 나오면,

자계천변의 독락당 담장이 보이고,

독락당에서만 사용할수있는 화장실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계정은 자계(紫溪)라는 개울에 맞붙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멋진 정자로,

3칸, 1칸의 평면에 계곡 쪽으로 쪽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으며,

비록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촐한 모습이지만,

그 가구 수법과 뛰어난 위치적 특성은 당대의 건축술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1620년경 소실된 것을 1650년에 복축한 것으로,

현재의 막새기와는 보수공사 때에 생긴 것으로 이전에는 없었다 합니다.

 

 

 

 

계정은 독락당의 한 공간으로 계곡과 집안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개울가의 초석 위에 바위의 생김에 따라 각기 길이가 다른 누하주를 세우고,

바닥을 마루와 방으로 구성하였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자계(紫溪)천변에 날아 오를듯 서있는 계정은,

이언적이 은거하면서 아버지가 쓰던 3칸짜리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고 옆으로 2칸을 달아내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자계(紫溪) 계곡의 아래 옥산서원쪽을 바라다 봅니다.

 

 

 

 

무극(無極)이 곧 태극(太極)?

독락당에 대해 가졌던 의문의 고리입니다.

이 집에서 표현된 이언적의 세계는 서로 독립된 주체들의 집합으로,

이것이 그가 젊었을적 주장한바 있던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란 성리학의 실체가 아닐까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속에 내려가서 이 집을 보면,

벽체의 일부만으로 보이던 계정이,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이 집을 지은이가 갖는 열린 시각의 출구가 되어,

맑은 물과 함께 바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홀로 즐기는 집은 독락당의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자유로운 세계라는 말이 정확한 뜻입니다.

모든 만물이 다 주체가 되어 공존하고 존재의 사유를 즐기는 그런 공간입니다.

 

 

 

 

 

안강의 독락당을 찾으신다면,

초입에 있는 독락당과 밀접한 관게의 옥산서원과,

독락당 위쪽에 있는 정혜사지 13층석탑도 함께 돌아 보실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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