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유적지 답사길에서 찾은곳은,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 (厖村 黃喜 1362~1452)의 묘역입니다.

 

황희정승 묘역에 이르면,

사당의 입구인 외삼문이 앞서서 반겨줍니다.

淸白吏(청백리)란?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직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으로,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에 힘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으며,

조선왕조 500여년 역사중 219명의 청백리가 배출 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황희, 맹사성, 이원익, 이현보, 이황, 김장생, 이항복등이 있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얼마간의 공간이 있고,

또하나의 외삼문이 나타나며 솟을대문 입니다.

 

조선왕조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이름 높은 재상(宰相)으로 칭송되는 방촌(庬村) 황희(黃喜1363~1452) 정승이며,

이 시대에도 항상 재상의 표본(標本)이 되는 인물로,

방촌(庬村)이라는 호(號)는 "삽살개 짖는 마을" 이란 뜻으로,

자연미와 인간미 있어 가장 멋이고 뛰어난 것으로 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율곡 선생의 묘역은 공원처럼 매우 잘 되어 있는데,

황희정승 묘역은 비교하자면 아주 간소하다고 느낄 정도의 분위기이며,

"영정각"으로 들어가는 삼문으로,

중간의 큰문은 제각의 주인인 신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으로 닫아두는것이 상례이고,,

양쪽의 작은문을 인문(人門) 이라하며 인문은 열어두어 참배객이 내왕할수있도록 열어둡니다.

 

 

 

황희정승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영정각" 입니다.

 

 

 

영정각의 현판이구요,

 

 

 

영정각의 내부입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厖村)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요청으로 관직에 나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영의정으로 국가대사를 돌보았으며,

세종 31년 86세로 은퇴한 후에도 세종대왕은 국가 중대사가 있으면 황희에게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개성 기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폭포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1376년(고려 우왕 2년)음직으로 복안궁녹사를 시작으로,

1394년(조선 태조 3년)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9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으로 부터 가장 신망을 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 옥동서원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성이며. 저서에 ‘방촌집’이 있습니다.

 

 

 

제를 올리고 난후,

축문등을 태우는 곳임을 표기하는 망료위(望燎位)입니다.

 

 

 

영정각 바로위에 있는 방촌황선생 신도비각(尨村黃先生神道碑閣) 입니다.

신도비(神道碑)란 왕이나 고관등의 평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를 말합니다.

 

 

 

방촌황선생신도비각 (尨村黃先生神道碑閣)의 현판입니다.

 

 

 

신도비각에는 두개의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으며,

비문이 마모된 원래의 신도비와 새로세운 신도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마모된 원래의 신도비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진 비로,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지었으며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원래의 신도비의 비문이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여,

그 옆에는 1945년에 다시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각에 함께 보호되어 있습니다.

 

 

 

원모재(遠慕齋)입니다.

황희정승 묘역의 안내문과 방명록이 비치되어있으며,

묘역을 관리하는 관리사로 보이며 근자에 지어진 건물로 보입니다.

 

 

 

원모재(遠慕齋)의 현판이구요..

 

 

 

원모재를 지나면 돌계단이 있으며,

사당으로 들어가는 솟을 외삼문이 보입니다.

 

 

 

외삼문의 문위에 있는,

방촌황선생부조묘(尨村黃先生不祧廟)의 현판입니다.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이란 뜻으로,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라는 의미 입니다.

 

 

 

황희정승의 일화 한 가지 소개하자면,

황희 정승이 실수를 하여 동전 한 닢을 연못에 빠뜨렸다.

황희 장승은 집에서 부리는 하인에게 연못에 빠진 동전 한 닢을 건지면 수고로 세 닢을 주겠다고 하였고,.

하인이 연못의 물을 퍼내고 동전 한 닢을 꺼낸 후, 황희 정승에게 갖다 주고 세 닢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인은 왜 세 닢을 주고 동전 한 닢을 건져 올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그래서 황희 정승에게 그 사유를 물었습니다.

황희 정승이 대답하기를

“물론 세 닢으로 한 닢을 꺼내면 나는 두 닢을 손해 본다.

그러나 나는 두 닢의 손해를 보지만 국가는 한 닢의 이익을 보고,

너 또한 세 닢의 이익을 본다.”

공익(公益)만 우선하면 개인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며,

반면에 사익(私益)만 우선해도 이기심이 나라를 망치게 되다는 교훈을 주는 일화 입니다.

 

 

 

 

제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당의 내부에는 신위가 모셔져있으며,

 

 

 

사당 앞에는 200년 수령의 향나무가 지키듯 서있으며,

황희의 묘가 이곳에 있게된 연유는 고향인 개성과 벼슬지인 한양의 정가운데 지점이어서,

양쪽을 언제나 볼수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해내려 옵니다.

 

 

 


황희선생 묘(黃喜先生 墓)입니다.

선묘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묘와 달리 매우 큰 봉분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초기 묘역의 형태인 장방형(長方形)의 구조로 봉분의 전면이 ㄷ 모양으로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여,

상석(床石)이 안으로 들어간 듯 한 느낌을 주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묘의 양쪽으로 동자석(또는 무인석) 2기와,

문인석 2기가 단을 달리하여 높이가 다르게 세워져 있으며,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봉분 우측에는 장명등과 묘비가 세워져 있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장대석으로 앞으로 내어놓은 모습은,

마치 발을 앞으로 내밀듯 들어낸 보이는 모습으로,

인근의 춘곡 정탁의 묘에서보다는 많이 간소하게 처리한 느낌을 줍니다.

 

 

 

풍상을 견디어온 묘비는,

오래되어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글자는 또렷이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묘비의 글은 "領議政翼城公 村黃喜之墓와, 繼配貞敬夫人 淸州楊氏"로,

"영의정익성공 촌황희지묘. 계배정경부인 청주양씨" 이라 새겨져 있으며,

묘비로 보아 2번째 부인과 합장했슴을 알수있습니다.

 

 

 

무인석(武人石)으로 보이는데 칼을 잡지 않고 있으며,

동자석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관을 쓰고 함께있는 문인석도,

세월의 이끼를 덮고 쓴 모습이 정겨워 보입니다.

 

 

 

묘역의 특징은 봉분앞으로 ㄷ자 모양의 호석(護石)을 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양팔을 내밀고 있는 형국으로 보이며 이와같은 묘제는 흔히 볼 수 없는 묘의 형태로,

아마도 봉분의 무너짐을 막기위한 과학적인 방법의 조치로 여겨지며,

거대한 봉분의 흙이 누르는 힘을 양옆으로 분산시켜 현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아닌가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고려시대 형인 직사각형 앞발, 뒤 꼬리형으로,

무덤의 뒷부분도 상당히 강조된 느낌을 주고 있는 모습으로,

능묘의 봉분 주위를 둘러 쌓은 돌을 호석(護石)이라 하는데 이곳은 호석을 앞쪽에만 쓴것이 특이 합니다.

 

 

 

1452년(문종 2년)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황희 정승은,

이곳 파주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안장 되었으며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이나 초야에서 모두 통곡하였고,

저마다 조문하고 각 부처의 하인들까지 제전(祭奠)을 드렸으니 이전에 없었던 일로,

장례가 치루어 지던 날 문종은 비록 신하이기는 하나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손수 장지인근까지 행차를 하였다고 합니다.

 

 

 

"세종(世宗)같은 임금에, 황희같은 정승"이라는 말이 있다.

 

전하는 말에, 조선시대의 정승은 넷 밖에 없다 합니다.

이 말은 이 분들의 이름 아래에는 대체로 '정승'이란 말을 붙이기 때문으로,

황희 정승을 비롯하여 맹정승 맹사성(孟思誠, 1359∼1438), 상정승 상진(尙震, 1493∼1564),

오리(梧里) 정승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을 가리키는데,

특히 방촌은 향년 90세에 별세한 장수한 정승으로 그 뛰어난 학문과 치정(治政)보다는,

그 휼륭한 인덕(仁德)으로 인한 처세와 삶의 지혜로 더욱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황희정승의 또하나의 전하는 이야기로,

임종하는 날 시중드는 아이가 물었습니다.

"대감께서 돌아가시면 소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갑니까?"

황희정승이,

"孔雀尙食飛蛛絲以生有何患乎
공작은 날거미줄만 먹고도 사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

라고 대답하고 아무 말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에 중국에서 공작 한 쌍을 조선에 보내면서,

잘 길러서 돌려보내라고 하였는데,

그런데 공작은 우리나라의 새가 아니므로 온 조정이 그 먹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황희정승이 온갖 짐승의 생태에 대하여 박식했다는 것을 아는 조정 관리가,

혹시나 하고 황희정승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문의하자,

시중들던 아이가 황희정승이 임종 시에 하던 말을 그대로 대답하였고..

그리하여 국가에서 많은 날거미를 채집하여 먹인바 과연 공작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금이 그 아이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현명한 재상은 사후에도 나라를 위하였다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우리에게 잘알려진 현명한 농부와 소에 대한 일화도 있으며,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에 대한 반대의 이야기도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파주의 유적지이며,

조선 초기의 큰인물로 남아있는 황희정승 묘역(黃喜先生墓域)의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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