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의 율곡 유적지를 찾으며,

유적지의 단지내에 있는 율곡기념관(栗谷記念館)과 율곡의 가족묘역을 다녀왔습니다.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선생 유적지라는 현판의 솟을 삼문이 보이는곳이 율곡 이이의 유적지입니다.

 

 

 

 

삼문으로 들어와서 왼쪽길을 택하면 자운서원이 있고,

오른쪽의 바른길을 택하면 초입에서 볼수있는 율곡과 산사임당의 동상입니다.

 

 

 

 

건너편의 산아래에,

품에 안기듯 묻혀있는 "자운서원"을 볼수가 있고,

 

 

 

 

봄을 맞은 라벤다는,

이곳을 찾은이들을 향해 진한 꽃향기를 뿌리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 기념관으로,

1986년 건립된 팔각정 양식의 건물이며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되어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하여 율곡선생 유품, 관련자료, 일대기 전시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기념관은 주로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층 전시실에는 율곡과 그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대형 초상화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덕수 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일찍부터 나타나,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기도 했다.

그의 주된 그림 소재는 풀벌레, 화조(花鳥), 매화(매화), 난초(蘭草),산수(山水) 등으로,

이런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였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글씨와 시 문장도 격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의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임당이 이렇듯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 도량 넓은 남편을 만난 점 등이 그의 재능에 힘이 되었고,

그러한 인간애는 자식사랑으로 이어져 그의 훈화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이는,

세째 아들 이(珥)로 훗날 이이는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한 네째 아들 우(瑀)와 큰 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어리도(紫?里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등이 있다.

(신사임당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사임당이 일곱살 때 그렸다는 산수화, 포도화, 그림병풍과 자수병풍과,

율곡의 누이 매창의 매화도, 율곡 아우들의 그림과 글씨등이 이곳에 진열되어있으며,

또한 율곡 선생의 저서인 격몽요결과 벼루, 율곡의 친필 서한등을 볼수가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은 있지만 두분의 살아옴을 둘러보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율곡 이이의 초상화를 이용한 포포존도 인기가 많았으며,

 

 

 

 

1층에는 병풍을 세운 것처럼 보이는 율곡의 5언 고시 <등 비로봉과 금강산>이 펼쳐져 있는데,

이 시는 600구 3000자의 글자로 쓴 시로 세계 최장의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파주의 정자 화석정을 배경으로,

율곡은 8세때 화석정의 가을 풍경을 시로 읆없다는 내용을,

일대기를 인형으로 알기쉽게 표현해두어 교육에도 도움이 되게 해두었습니다.

 

 

 

 

율곡이 16세때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났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정성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을 모셨는데,

그러는동안 삶과 죽음에대한 고민과 자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님의 시묘살이를 마친 19세때,

율곡은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에 귀의 하게 되지만,

1년만에 환속을 하여 금강산에서 나오게 되며 "자경문(스스로 경계 하는 글)"을 짓고,

유교의 교리에서 성인의 길을 찾기위해 각오와 뜻을 세우게 됩니다.

 

 

 

 

유명한 "구도장원"의 내용입니다.

13세때 진사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를 한후,

21세에 "한성시"에, 23세에는 "천도책"으로 장원급제 하였으며,

1564년까지 모두 아홉번의 장원급제 하게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이이의 관직 생활중,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재현해 두었습니다.

율곡이 올린 수많은 상소중 선조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상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42세에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짓고 제자를 키우는일에 힘을 쏟았는데,

성리학의 이상을 향촌 사회에 실현하고자 하는 대동(大同)사회에 대한 이이의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후일 다시 조정의 부름으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판서 등을 거치며 시무6조를 올려 국방을 튼튼이 하고자 했습니다.

 

 

 

 

2층 전시실에는 율곡의 사상을 정연하게 전시하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자운서원과 율곡기념관을 둘러보면 위인에 대한 현장 교육과 선현들의 생각과,

자라온 내력을 쉽게 살필볼수 있어서 함께 둘러봄직 합니다.

 

 

 

 

기념관의 2층 전면에 나있는, 

발코니에서 내다 보이는 자운서원의 주변모습 입니다.

 

 

 

 

율곡의 가족묘로 향하는 길에는,

피어나는 잎이 붉게 물들어 나오는 단풍나무가 눈길을 끌어주고..

 

 

 

 

맞배지붕 으로된 한채의 건물을 만나게되는데,

 

 

 

 

"재실(齋室)" 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이곳은 유적지를 관리하는 관리사나,

율곡의 문중에서 사무실등으로 사용하고 있는듯 합니다.

 

 

 

 

율곡의 가족묘 초입에는,

시원한 그늘과 저수지가 자리해 있으며..

 

 

 

 

저수지의 주변에서 볼수 있는 하얀 민들래 입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공해에 강한 왜래종인 노란 민들래는 흔이 볼수있지만,

공해에 약한 토종인 하얀 민들래는 깊은 산중이나 오지섬이 아니면 찾기가 힘드는데,

아직은 이곳이 깨끗한 청정지역임을 알리는듯하며 오랫만에 보게되어 반가울 따름입니다.

 

 

 

 

율곡 가족묘의 앞을 지키는 여견문(如見門)입니다.

파주 이이 유적에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비롯한 11기의 가족묘가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묘역의 맨 윗자리에 자리 잡고있는,

율곡 이이(1536∼1584) 와 부인인 곡산노씨묘 입니다.

 

 

 

 

조선 중기 유학계에서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 이황과는 달리,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현실참여적인 실천적 학문으로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 이이,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을 주도한 율곡의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봉분 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에 묘비가 위치해 있으며,

그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각각 세웠두었는데,

특이하게도 부인인 곡산노씨묘 가 이이의 묘보다 약간 뒤쪽에 자리해 있습니다.

 

 

 

 

율곡의 묘앞을 지키고 서있는 문인석의 표정을 담아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1551)과,

남편 이원수(李元秀)합장묘이며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로 키 작은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의 맨 아래쪽에는 이이의 맏형인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1973년에 율곡 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2013년 2월 율곡 이이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으며,

자운서원과 함께한 율곡기념관과 가족 묘역을 돌아보았습니다.

 

파주의 가볼만한곳으로 파주 율곡 이이 유적지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