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과 유릉을 찾았습니다.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를 모신 곳인,

홍릉.유릉(홍유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중 조선왕릉으로 지정되었으며,

홍릉(洪陵)은 대한제국의 초대황제 고종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며,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융희제과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의능 입니다.

 

 

 

 

홍,유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능으로 들어가는 매표소의 안내문입니다.

 

 

 

 

능의 입구 맞은편에는,

홍,유릉의 역사문화관이 자리해 있으며,

 

 

 

 

단층 으로된 전시관에는,

홍,유릉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조선 왕릉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능으로 들어가기전에 사전답사겸 둘러보시면 홍,유릉의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지금에 와서야 홍,유릉이라고 이름하지만,

예전의 능의 명칭은 금곡동에 있어서인지 "금곡릉"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홍릉으로가는 초입에 보이는 홍릉 연지에는,

방형이 아닌 원형으로 풍수에따라 중간에 섬이하나 있으며 봄을 맞는 수련의 모습이 보입니다.

 

 

 

 

홍릉의 재실입니다.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상주 하는곳이며,

제례시에는 제사를 준비하며 제관들이 머무는곳입니다.

 

 

 

 

능으로 들어가기전에,

재실을 먼저 들어가 봅니다.

 

 

 

 

이곳에는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과,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과 제기를 보관하는 "재기고"와,

제물을 준비하는곳인 "전사청"외에 부속건물인 행랑등이 있습니다.

 

 

 

 

제를 올릴때 제관들이 머물렀을것으로 추측이되는 공간이구요,

 

 

 

 

마루의 모양과 문의 모습에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볼수가 있습니다.

 

 

 

 

대문채를 포함해서,

석줄로 길게 늘어선 건물들로,

능을 관리하고 제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상당히 큰규모로,

 

 

 

 

사대부의 고택등에서 보아왔던 한옥과는,

건물의 양식,부재등에서 격조가 다름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재실의 옆문을 나와 홍릉으로 향합니다.

 

 

 

 

홍릉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으로,

원래 홍릉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2년전에 명성황후는 일본의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동구릉에 모셔져 있다가 고종황제가 승하하신 1919년에 이곳에 합장되었습니다.

 

황제의 릉은 왕의 릉과 기본적으로 많은 부분이 다른데,

황제의 릉은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석상들이 정열해 있으며,

말, 낙타, 사자, 해태, 코끼리, 호랑이, 무인석, 문인석 그리고 정면5칸 측면4칸의 제를 지내는,

침전이라는 왕릉의 정자각 기능을 하는 건물이 있고 그 뒤로 강을 만들고 능침을 조성되어 있습니다.

능침에는 곡장을 두르고 병풍석과 난간석, 망부석과 장명등 그리고 혼유석 정도만 있고 나머지 석물은 모두 침전 앞에 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홍릉은 조성이되었는데,

고조 광무제의 인산일(1919년)에 눈에 가시같은 고종이 승하하자,

비록 황제릉이라지만 석물을 조형하는 예술적 가치는 뒤로하고 초라한 석물을 조성하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해태상의 모습이구요,

 

 

 

 

홍릉의 문인석과 웃음이 보이는 무인석의 모습입니다.

 

 

 

 

침전앞 석조 조형물의 옆의 한쪽에는,

작은 연못으로 보이는 공간도 있는데 물은 말라있습니다.

 

 

 

 

조선 왕릉에서의 제사공간인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능의 제도를 따라 조성된 황제릉 입니다.

홍릉과 유릉은 종래의 왕릉과 형식이 다르며 모두 광무 이후 황제라 칭하던 왕이었던 만큼 명태조의 효릉을 본따서 조영하였다고 합니다.

 

 

 

 

홍릉의 비각입니다.

비각은 능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두는 공간으로,

 

 

 

 

홍릉 비문을 살펴 봅니다.

대한 고종태황제홍릉(大韓 高宗太皇帝洪陵), 명성태황후부좌(明成太皇后祔左)라 쓰여 있으며,

이비는 일제에 의해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애국능참봉의 살신성인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며,

비문의 뒤는 일제가 아예쓰지 못하게 했는데 몰래쓰다 들켜서 지워진 모습을 볼수가 있는 아픈역사가 있는 비석입니다.

 

 

 

 

능침에서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봅니다.

 

 

 

 

능침의 내부인 침전의 천정 모습이며,

 

 

 

 

침전의 모습입니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긴 하지만 황제를 의미하는 노란색의 침상이 있어서,

돌아가신 황제의 휴식의 공간으로 해석할수가 있습니다.

 

 

 

 

능의 모습을 보고싶었으나,

세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로는 올라갈수없는 공간이 되어서 먼발치 에서나마 바라볼 따름입니다.

 

 

 

 

홍릉을 나와 연지를 기점으로,

또다른길을 잡아 유릉으로 향합니다.

 

 

 

 

유릉 입구의 재실을 만나게 되며,

 

 

 

 

재실의 문앞에는,

"왕릉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사진으로보는 조선왕릉의 모습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재실의 솟을문을 들어서면,

본청인듯한 전각의 모습이 들어오고,

 

 

 

 

조선왕릉의 모습과 관련 사진등이,

마당을 중심으로 행랑채를 비롯한 건물앞에 전시된 모습입니다.

 

 

 

 

봄을 맞는 휴일에 왕릉을 찾은 이들에게되 좋은 볼거리와,

함께한 아이들에게는 조선의 왕릉을 이해할수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있습니다.

 

 

 

 

마당의 사진전을 둘러보구서 재실의 전각도 돌아봅니다.

 

 

 

 

홍를의 재실과 이곳 유릉의 재실은 건물의 배치구조가 다름을 볼수가 있습니다.

 

 

 

 

왕릉 사진전에서 보이는,

이곳 유릉의 주인인 조선의 마지막왕로 53세를 일기로 승하한,

일제시대에는 이왕(李王)으로 불리기도 했던 순종황제(재위 1907~1910)의 국장의 한부분의 기록사진 입니다.

 

 

 

 

사진전에서 보이는 순종의 능인 "유릉의"의 모습입니다.

 

 

 

 

능쪽으로 나있는 재실의 문을 나와 능으로 향합니다.

 

 

 

 

이곳 유릉은,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민씨 및 계비 순정황후 윤씨를 모신 능으로,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씨의 능으로 양주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인산 때 이곳에 이장하였고,

1966년 순정황후 윤씨를 또한 이곳에 함께 모신곳 입니다.

 

 

 

 

홍릉과 마찬가지로,

홍살문을 통과하면 양쪽으로 설치되어있는 구멍이 나있는 석물이 있습니다.

 

 

 

 

홍릉 석물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유릉의 석물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으나,

순종 능의 석상들은 일본인 미대교수가 주관해서 만들어서,

동물들은 사실적으로 조각하였지만 문인상을 무인의 얼굴처럼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눈에 가시같은 고종이 승하하자 비록 황제릉이라지만 석물을 조형하는 예술적 가치는 뒤로하고,

초라한 석물을 조성한 형태를 볼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종황제의 유릉은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통제 아래 있는 조선의 이왕이 승하하였으니,

이 얼마나 원통하고 슬프냐 하며 오히려 이왕의 장례를 훌륭하게 치루는 것 처럼 석물의 크기를  홍릉보다 훨씬 크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실제 유릉의 석상들을 살펴보면 문인석의 얼굴이 샌님 이방같은 표정이요,

무인석은 장군의 얼굴이 아니고 졸병의 얼굴을 그려 오히려 제대로된 모습의 예술적가치나,

시대적인 조형미가 뒤떨어지게 만든 모습에 분노를 느끼게 한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유릉의 비각과 석상의 모습입니다.

 

 

 

 

순종황제의 비문으로,

순명황후 민씨와 순정황후윤씨 세분을 이곳에 모셨슴을 알수있습니다.

 

 

 

 

홍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이 아닌 침전이 능아래에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의 구조입니다.

 

 

 

 

침전의 내부에는 홍릉과 마찬가지로 침전의 모습을 볼수가 있고,

 

 

 

 

재실을 옆으로하여 능을 나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왕의 무덤인 능(陵)도 세자의 무덤인 원(園)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墓)로 격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왕공가궤범을 따르자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왕릉이 될 수 없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원 홍릉(청량리)에서 현 홍릉(남양주시)으로 옮겨와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구 유릉(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모셔와 합봉(남양주시)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것을 막을 법적인 근거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그러나 본래 왕릉 장법에서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개의 능침이라 하여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에 묻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원래 왕릉 장법에 따르면 새로운 능호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자료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세우기위해 고초를 겪으며 애쓰다 가신 고종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 오른 이름뿐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기울어진 국운속에서 조성이된 홍유릉,

지금껏 보아온 조선왕릉에 비교하자면 작아진 공간에 아쉬움이 느껴지는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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