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철종의 유적이 몇곳있는데 ,

유배기간 동안 살았던 강화에는 유수부 관아부근의 용흥궁과,

잠시 교동도에 피신했던 철종잠저소 등이 있으며 그의 외가가 남아 있으며,

강화의 유적지중 찾은곳은 "철종외가" 입니다.

 

철종의 외가로 들어가는 길은,

의외로 소박해서 크지않은 주차장에서  짧지만 비포장으로 되어 있으며,

 

 

 

 

입구에는 강화도령으로도 불리웠던 철종의 첫사랑길 안내문이 보입니다.

철종은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1844년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헌종의 뒤를 이어 1849년 19세로 즉위했으나,

재위기간 14년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했고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며,

국왕으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서른셋 젊은 나이에 병사했던 왕입니다.

 

 

 

 

조선 철종 4년 (1853)에 지어졌으며 철종임금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던 집으로,

철앞에 넓은 전답이 바라보이는 완만한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집 뒤는 완만한 경사지여서 배산(背山) 한다기보다 차분하게 앉아 있기에 권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않으며,

대문이 솟을대문이 아닌 평대문이기에 더욱 편안해 보이는데..

원래는 용흥궁과 같은 솟을대문이었다고 하며 이전처럼 솟을대문이 있었다면 집의 모습이 달라 보였을것 입니다.

 

 

 

 

이곳의 평면도를 먼저 살펴보고 들어가기로 합니다.

당시의 일반 사대부의 웅장한 집의 규모와는 달리 법도에 맞도록 고졸하게 지은 집으로,

처음 지을때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 자형 가옥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 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있습니다.

 

 

 

 


담장과 연이은 평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봅니다.

 

 

 

 

철종 4년(1853년)에 지은 집으로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다고 하며,

용흥궁이 지어진 시기와 일치하며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지은 것으로 보이며,

철종의 외가도 철종의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서 옮겨왔는지, 강화 토박이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족인 철종 집안이 심한 감시속에 살았기에 염씨 집안 역시 그리 넉넉지 않았을것으로 추측되며,

그후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외척으로서 걸맞은 대우를 위해 이 집도 새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채은 앞면 4칸규모로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주춧돌로 석재 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목재난간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누마루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누마루 아래에 온돌방 아궁이를 설치해 놓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랑채 좌측은 누마루가 전면으로 돌출돼 있고,

안채 우측의 부엌과 방들 역시 돌출돼 있어 전체적으로 ㄷ자 형태인데,

이러한 모습 때문에 사가(私家)가 매우 크고 장대하게 느껴집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는 "매헌서당(梅軒書堂)" 이라는 현판이 보이며,

이곳은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의 양식인 1850년대의 대청마루와 출입문의 형태로,

평소에는 오른쪽 손잡이문을 열고 사용했으며 잔치등 집안의 큰행사가 있는경우에는,

4개의 문이 좌,우로 2짝씩 겹치면서 모두 열수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문의 모습입니다.

 

 

 

 

사랑채를 둘러보면 대목의 솜씨가 엿보이는데..

사랑채는 ㄱ자 형태로 1칸 규모의 대청 좌우에 2칸짜리 방이 있는 구조로,

예전에는 사랑채 누마루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누마루 앞의 연못은 적절한 배치로 보입니다.

 

사랑채 누마루는 바로 행랑채에 가려 전망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인데,

이러한 조망의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연못을 배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누마루는 연등천정으로 팔작지붕일 경우 선자(扇子) 서까래의 마구리가 모이는 부분을 합각으로 처리하는 구조와 얽혀 매우 복잡해지는데,

선자 서까래를 정확히 짜지 못하면 흉하기에 대부분 눈썹천장을 설치해서 가리는데 이곳은 그대로 노출시켰으며,

합각 부분의 목구조를 간결하게 처리하고 선자 서까래도 잘 짜놓아 모양새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모습으로,

선자 서까래가 매우 가지런한 것이 솜씨 좋은 목수가 지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눈썹천장을 설치해서 굳이 가릴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 대목의 자부심을 느낄수 있는 모습입니다.

 

 

 

 

 

등잔이나 양초등을 올려두어,

불을 밝힐수있는 장치를 마루 천정 아래에서 볼수가 있으며,

 

 

 

 

사랑채의 왼쪽으로 나있는 중문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가봅니다.

 

 

 

 

중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안채의 모습이 들어오고,

 

 

 

 

이곳의 집의 구조와 배치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이어져 있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 누마루가 보이고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붙어 있으며,

문에서 바라보이는 4칸 사랑채에 연이어 1칸 부엌이 붙어 있고,

그 좌측에 4칸 안채가 이어져 있는것이 즉 부엌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나뉜모습 입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전면 9칸의 단일 건물로,

이렇게 마당을 공유하면서 연이어 한 건물로 지은 경우를 보기가 쉽지않습니다.

건축양식은 전체적으로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일자로 곧장 연결시켜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구획한 것이 특징입니다.

(화장담- 주로 사대부집에서 사용 되었던 일종의 중간 담장)

 

 

 

 

 

안채는 부엌을 포함하여 앞면 5칸 규모로,

집안행사 등을 위한 공간으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그 양쪽으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로,

안채는 대문 우측의 중문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칸은 현재 凸자 형태로,

원래는 안채 마당 쪽으로 광이 1칸이 더 있었다고 합니다.

건물의 배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중문의 위치가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으며,

이 집에는 별도의 사당을 두지 않고 안채 건넌방 즉, 사랑채와 가까운 방을 사당으로 사용했다고 전합니다.

 

 

 

 


음식을 마련하는 부엌에 안채 오른쪽 날개채에 있으며,

다락방이 있는 2칸규모로 상당히 큰 편으로 그 옆으로 행랑채를 달아 내었습니다.

 

 

 

 

사진에는 어두워 잘보이지 않으나,

부엌 바닥에는 묻혀진 항아리가 있습니다.

주인의 말로는 물을 퍼내기 위해 항아리를 묻었다고 하는데 매우 특이한 경우 입니다.

물이 많은 곳으로 많을 때는 아궁이까지 물이 들어차 불이 꺼져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며,

아궁이 가까이로 들어오는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고자 항아리를 묻었다고 합니다.

 

 

 

 

사랑채에 이어 안채를 둘러보면,

당시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크기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배여있는 모습입니다.

 

 

 

 

안채의 뒤편을 보기위해 부엌 뒤쪽으로 나가보면,

우물과 함께 장독을 놓아 두었던것으로 보이는 장독대의 모습이 들어오고..

 

 

 

 

철종외가와 관련된 일화를 하나 전하자면,

철종 임금 시대(1849~1863)에는 대체로 나라가 불안하고 어수선한 시기로,

경기도 파주 근방에 염종수(廉宗秀)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성격이 교활하고 허풍스러운 데다 남다른 과시욕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장터에 나갔다가 새 임금 철종의 외가 집안이 용담(龍潭) 염(廉)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염종수의 용담 염씨는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 염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따지면 임금과 자신은 한 뿌리가 된다는 것에 착안을 하여 다음날 염종수는 야심을 가지고 강화도로 달려가 조사를 해보니,

예상대로 철종의 외가는 자손이 끊어져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가족의 무덤도 돌보는 사람 하나 없는 폐허와 같이 되어있어

염종수는 한양으로 돌아오자 곧 용담 염씨의 족보를 구해 남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는 방법으로 족보를 고치는 작업에 착수해두었는데,

철종의 외할아버지인 염성화의 가계가 자신의 가계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는 철종 임금에게 위조된 족보와 함께 상소를 올려,  “상감마마의 외갓집이 너무 살림이 어렵고 후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염씨로 양자를 들여 새로이 일가를 이루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저의 아들을 양손자로 세워 끊어진 대를 잇게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친척 하나 없어 항상 외로움을 느끼던 철종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으니 곧 족보를 확인한 후 철종은 염종수 부자를 대궐로 불렀습니다.

뜻하지않게 외사촌 형제가하나 생긴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의논해 주시오. 내가 도울 것이요.”

철종은 염종수를 외삼촌이라 부르며 전라도수군절도사라는 벼슬도 함께 내렸습니다.

 염종수는 이제 자신의 집안이 된 철종 외가의 묘역을 단장하기 위해 곧 강화도로 향했고,

철종의 외할아버지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거기에다 원래의 용담이라는 글자 대신에 자신의 본관인 파주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그후 철종의 외삼촌이자 높은 벼슬까지 하게 된 염종수는 갖은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고 술과 여자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는 법,

몇 년 후 그의 이상스런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강화도의 파주 염씨 성을 가진 염보길이라는 사람이 그의 가짜 행동을 들춰내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된 철종은 수치감으로 몸을 떠는 한편,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고,

어머님에 대한 죄책감과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전하며,

마침내 염종수는 철종 앞으로 끌려나왔으며  “저 놈을… 저 놈을… 내 앞에서… 끌어내라.”하며  철종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강화도 고을 원님은 사람을 보내 철종 외가 염성화의 비문의 파주라는 글자를 지우고 용담이란 글자로 새겨 넣었는데,

지금 강화도에 있는 염성화의 비석을 보면 坡州(파주)라는 글자를 깎아낸 오목한 자리에 龍潭(용담)이라고 새로 새긴 글자를 볼수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앞에는 담장으로 막혀있지만,

뒤쪽으로 쪽마루가 쭉 연결돼 있었는데 수리하면서 지금처럼 분절해 설치했다고 한다.

예전 쪽마루가 연결된 것은 내부의 동선을 원활하게 함일 것으로 쪽마루로 방들을 연결하는 예는 가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집을 길게 지은 것은 사랑채와 안채를 앞뒤로 배치할 경우,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하고 주변이 넓으므로 자칫 집이 왜소해 보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듯하며,

명색이 왕의 외척 집이라 작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은것으로 사료되며

평지에서 집이 크게 보이도록 전면을 넓혀 배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은,

강화도령 철종의 첫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로 유명하며,

이길은 원범(원범, 철종 아명 1831∼1863)이 강화도에서의 귀양살이 중,

강화도 처녀 "봉이"(양순 이러고도 함)와 나누었던 풋풋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는 도보 여행길 입니다.

 

강화도에서 봉이란 이름의 하층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이 지냈었는데,

하지만 왕이된 이후 봉이의 너무 신분이 천해서 바로 후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까이 부를수 없었고,

철종이 양순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하여 괴로워하자 조선 왕실에서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고,

이를 알게된 철종은 비탄에 잠겨 여생을 술과 여색으로 탕진하다가 33세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철종과 봉이의 아픈 첫사랑의 이야기가 있는 14코스의 종점이 철종외가 이기도 합니다.

 

철종의 첫사랑의 슬픈이야기가 있는,

강화도령의 첫사랑길의 종점지인..

간결하지만 잘지어진 조선후기의 건축미를 볼수있었던,

기억에 남을 강화도의 문화재 "철종외가"의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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