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문화재를 찾아서 길을 나섰습니다.

찾은곳은 인천 연수구에 위치한 "원인재" 입니다.

 

원인재(源仁齋)는 승기천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승기천 건너에서 원인재의 모습을 담아 보았습니다.

 

 

 

 

5월을 보내는 승기천변에는 찔레꽃이 가득해서,

진한 향기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어 봄의 절정에 와있슴을 느끼게 합니다.

 

 

 

 

원인재(源仁齋)의 초입 입니다.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李許謙) 의 묘려(墓閭)로서,

일반적으로 중시조란 이름이 별로 없던 성(姓)씨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선조를 말합니다.

 

 

 

 

원인재의 입구의 한쪽에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1152∼1220)시비가 있으며,

이인로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무신정권 아래에서 관직은 좌간의대부를 거쳤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그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 ;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며,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 ; 뜻의 묘함)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 새로운 뜻)를 중시하였다고 평가가되는 인물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고려사≫열전(列傳)에서 평가한 내용입니다.

 

 

 

 

 

원인재의 입구에는,

세운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큰비석이 자리해 있고,

 

 

 

 

 

높은 담장사이에 솟을 외문이 자리해 있습니다.

 

 

 

 

솟을 외문의 현판은 "침소문" 으로,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곳은 원인재의 후문이라고 하는데,

후문앞에 신도비명서와 이인로의 시비, 그리고 커다란 비석과 주차장등을 후문쪽에 내어둔 배치가 특이합니다.

 

 

 

 

침소문의 문은 안으로 굳게 닫혀있어서,

 

 

 

 

다른쪽에 열어둔 문이 있을까 해서,

한바퀴 돌아 보기로 하고  원인재의 배치도를 미리 살펴 봅니다.

 

 

 

 

번호를 두어 건물등의 위치등을 찾기쉽게 표시해 두었고..

 

 

 

 

담장이 높아,

아래에 돌을 받치고 까치발로 안쪽의 모습이 궁굼해 들여다 봅니다.

 

 

 

 

위풍당당한 큰규모의 원인재의 모습은 담장 밖에서도 보이며,

이 건물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32대손이 쓴 [원인재기]와 33대손이 쓴 원인재 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 7년(1807) 또는 고종 4년(1835)인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또한 건물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이곳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건물에는 큰글씨로 길게 자랑스러운 글귀를 내걸어 두었습니다.

인천이씨의 문중에서 왕비가 10 명이 배출 되었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고려시대의 왕이 8명이나 이집안에서 배출되었다는 표현에서는 고개가 갸웃겨려집니다.

조선시대엔 윤씨와 민씨 안동김씨 등에서 왕비가 많이 나왔는데,

그들 문중에서 왕이 배출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도 왕이 되었지만 장씨 가문에서 왕이 배출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팔을 위로 들어올려 렌즈에 겨우 들어오는 돈인재의 건물이구요.

팔작지붕 형식인 이 건물의 건립년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고려사』에 보면 그의 선조는 신라 때부터 지금의 인천인 소성현에 살았는데,

신라 사신으로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부터 성(姓)을 받았다고 하며,

인천 이씨가 고려시대의 귀족대열에 낄 수 있게 된 것은 이허겸 때부터로, 그의 손녀 3명이 모두 현종의 비(妃)가 되면서 부터이며,.

첫째 손녀는 원성황후로 덕종과 정종 두 왕을, 둘째 손녀는 문종을 낳았습니다.

그 뒤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고려시대 귀족정치의 막강한 파벌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담장을 따라 돌다보니 승기천 방향으로 나있는 솟을 삼문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원인재의 정문인 "경선문"입니다.

후문인 침소문 앞의 여러가지 석물이 있는것과는 달리,

정문인 경선문 앞에는 비포장의 산책로만 지나갈뿐 아무것도 없으며 정문 또한 안으로 굳게 닫혀 있습니다.

 

 

 

 

경선문에서 왼쪽으로 담장 너머로 들여다본 모습이며,

 

 

 

 

정문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내부의 모습입니다.

 

 

 

 

경선문에서 조금더 앞으로 나아가니,

높은 담장이 사라지고 트인 가운데 안이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유일한 공간이 나오는데,

 

 

 

 

차량이 출입할수 있도록 트인 공간인듯 한데,

이곳 마저도 굳게 닫혀있어 기웃거리며 들여다 보아야 할뿐입니다.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李許謙) 의 묘(閭)로 보이는 무덤이 담장너머 언덕위로 보이며,

 

 

 

 

이곳 또한 굳게 닫혀 있어,

담장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기웃거리기만 하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립니다.

파주에서 차를 달려서 아주먼 거리는 아니지만,

중동-송내간의 상습 체증구간을 넘어서 마음 먹구서 답사를 왔는데,

높은 담장으로 문은 닫혀 있지만 어디로 연락하면 들어갈수 있는지 안내문은 보이질 않아,

크게 써서 걸어둔 현수막으로 왕 자랑은 내세우고,

사람들의 방문으로 관리하기 번거러워서 인지  보여주긴 싫어서 문은 걸어두는것으로 보여져,

아쉽고 씁쓸한 방문길이 되어버린 인천의 문화재인 "원인재"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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