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돌아보면서,

산성 주변의 문화유적중 백미라 할수있는 수어장대(守禦將臺)에 올랐습니다.

 

남한 상성의 유적지중 지수당과 침괘정,

산성 로타리를 기점으로 행궁등을 돌아보고 수어장대로 오르기로 합니다.

 

 

 

 

보통은 행궁옆으로 오르는길을 이용하는데,

어쩌다보니 만해기념관 옆을 지나는 오솔길로 오르게 되었는데,

주변에서 장사를 하고 계시는 주민분은 이 오솔길이 지름길이라고 일러 주십니다.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길위에는,

산성을 따라 이어지는 너른길이 나오고..

 

 

 

 

이길은 때로는 산성과 이어지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남한산성은 둘레 12km에 이르며 중심 도시가 입지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를 안고 있어,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였습니다.

 

 

 

 

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남시의 한부분의 모습입니다.

 

 

 

 

남한산성은 축성술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조선, 일본의 아주치-모모야마 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물 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건축과 평면 형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산성을 따라 트레킹을 즐기시는분도 계시고,

시원한 그늘과 노송들의 풍경속의 큰길을 따르며 수어장대로 향하는분들도 있습니다.

 

 

 

 

수어정대로 오르기전,

성벽의 안쪽에 작은 통로와 같은 모습이 들어오고,

 

 

 

 

서암문으로 제6암문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습니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으로,

암문은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육축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 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적에게 역습을하는 통로인데,

따라서 암문은 평지성 보다는 산성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형적으로 설치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암문은 성의 방어와 관련된 중요한 시설인 만큼 삼국시대부터 축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의 기본적인 구조물로서 자리잡은 것은 조선시대 이후로 보인다고 합니다.

문의 숫자는 성의 규모에 비례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지형적인 여건에 더 크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암문이 이와같이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다 하더라도,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암문 만이 설치되였으며,

암문의 내측에 옹벽이나 흙을 쌓아 두어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꾸어,

필요할 경우에는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하는데,

그중 원성에 가장 많은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습니다.


암문의 규모는 기능과 산세의 지형및 위치에 따라 크기가 서로 다르게 세워졌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산성 동쪽 수구문 남쪽 20m 지점에 있는 11암문으로,

암문의 폭은 286cm이고 높이는 307cm에 달하여 성문에 가까울 정도의 크기인 암문도 있으며,

반면 가장 작은 암문은 수어장대 남서쪽의 이곳에 있는 6암문으로,

푹은 77cm이고 높이는 155cm에 불과해 성인 1명이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게 되어있습니다.

 

 

 

 

제6암문 앞에는,

언덕을 오르는 길이 나있으며 수어장대로 가는길입니다.

 

 

 

 

그 길목 어귀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눈길을 끌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이름모를 들꽃이 마중을 해주고..

 

 

 

 

그리 크지않은 솟을 외문이 반겨줍니다.

 

 

 

 

수어장대 아래에 자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 입니다.

청량당(淸凉堂)은 수어장대 담 밖 서쪽에 있는 당집으로,

이 집에는 남한산성의 동남쪽 부분 축성 책임자였던 이회(李晦)와 그 부인 그리고 서북성을 쌓은 벽암 스님 김각성(金覺性)의 혼령을 모신 사당으로,

회는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자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게 되어 처형당하게 되고,

이회의 처와 첩은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습니다.

그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와 처첩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고 하며 그의 혼령이 이곳청량당(淸凉堂) 에 봉안되었습니다.

청량당 대분은 정면3칸, 측면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맛배지붕 건물인데,

좌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습니다.

 

 

 

 

안내문에 있는 경기도 당굿의 모습으로,

이곳은 그전에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면 인근의 만신들이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 한후 이곳에서 정성껏 치성을 올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회와 그 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월 초 2일은 부인 송씨가 한강의 쌀섬여울에서 투신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있던 이회, 벽암대사, 그리고 이회의 처 송씨와 후실 유씨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하였으며,

이곳 청량당에 벽암대사를 함께 모시는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나누어 축조하였고 또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승군을 이끌고 용전분투 하였으며,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성하의 맹세’를 맺은 것을 보고 표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므로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청량당에 그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청량당(淸凉堂)의 영정을 가져왔습니다.

 

 

 

 

청량당은 보수 공사중이라 들어가 볼수가 잆지만,

화방벽(火防壁)을 눈높이 만큼 올린 3칸 문간채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청량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습니다.

청량당(淸凉堂) 이라는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 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또한 청량(淸凉)이란 단어는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합니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건물은 정면3칸, 측면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로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으며,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문을 달고 좌우측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고 합니다.

 

 

 

 

청량당(淸凉堂)앞 마당 한쪽에는,

노거수 향나무 한그루가 고고한 자태로 서있으며,

 

 

 

 

낮은 담장을 넘어 수어장대의 마당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노송과 함께 모습을 보이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守禦將臺) 입니다.

 

 

 

 

산성 서편의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 4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1624∼1626)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며,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는 장대로,

외부 정면에 수어장대(守禦將臺) 라고쓴 현판이 안쪽의 2층에는 무망루(無忘樓) 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산성 내의 최고봉인 일장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곳으로 군사 요충지 입니다.

 

 

 

 

안내문에 있는 수어장대의 옛모습으로,

오래된 옛사진에서도 수어장대(守禦將臺)의 기품이 엿보입니다.

 

 

 

 

수어장대(守禦將臺)의 현판으로,

수어장대라 크게 쓰고  병신계하하한(丙申季夏下澣)이라 쓰여져 있으며,

1836년 6월 하순에 박주수(朴周壽: 1787~1836)가 생애 마지막 유묵으로 남긴 글로,

박주수(朴周壽)의 본관은 반남, 자는 군여로 시호는 익헌(翼獻)입니다.

 

 

 

잘 다듬어 놓여진 주춧돌과 1층 대청으로 오르는 디딤돌을 살펴봅니다.

 

 

 

 

수어장대의 너른 대청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로 면적은 1층 105.08㎡, 2층 43.29㎡이며,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으며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올라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어장대 곁에있는 무망루(無忘樓)편액 전각입니다.

무망루는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이며,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그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여 두었습니다.

 

 

 

 

전각의 바닥에는,

무망루(無忘樓) 현판에 대한 설명이 있어 그내용을 모두들 읽어 보지만,

 

 

 

 

정작 전각에 걸려있는 무망루(無忘樓)의 현판은 보지 못하고 그냥 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무망루(無忘樓)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후 왕위에 오른후 복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무망루"라 이름지은 것입니다.

 

 

 

 

수어장대 앞마당끝 왼편에 보이는 매바위 입니다.

이회를 처형한 후 그가 쌓은 성벽을 조사해 보니 성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었으며,

다만 산세가 워낙 험하므로 성벽 기초공사 등으로 기일이 지연된 것을 알게 되어,

그리하여 여기청량당(淸凉堂) 당우를 세우고 그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라고 전하는데,

 

전설에는 형장에 선 이회가 말하기를 “내가 죽는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 올 것이니,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내가 무죄인줄 알라”하였습니다.

과연 그가 처형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이회의 죽음을 바라보았다고 하며,

그 바위를 매바위라 하는데, 수어장대 모퉁이에 서 있는 이바위 입니다.

 

 

 

 

매바위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매바위 너머에는 노송의 군락이 눈에 들어옵니다.

 

 

 

 

수어장대란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지휘, 명령하는 곳으로,

건립 당시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하였고,

영조27(1751)년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증축하여 내편은 무망루, 외편은 수어장대라 명명하였습니다.

이 수어장대는 인조14(1636)년 병자호란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태종의 12만 대군과 대치하며 45일간 항전으로 버티던 곳이며 항전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습니다.

 

 

 

 

수어장대를 나오고보니,

후문으로 들어가서 돌아보고 정문으로 나오는 형상이 되었습니다.

 

 

 

 

수어장대에서 행궁방향으로 내려오는길에 만나게 되는,

임금이 물을 마셨다는 아래어정 약수터로 현재 폐쇄되어 목을 축이고 갈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약수물이 나오는 곳이,

옛날 대포모양을 해두어 특이한데,

포구로 나오는 약수를 마셔볼수가 없슴이 아쉽습니다.

 

 

 

 

내려오는길도 어찌 하다보니,

큰길에서 벗어나 소로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내려와보니 만해기념관 옆길로,

한곳에서 두갈래의 길을 오르내리며 왕복한 형상이 되었습니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수어장대의 무망루(無忘樓) 글귀를 되새기며,

남한산성의 문화재의 백미인 수어장대(守禦將臺) 답사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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