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문화재중 남한산성의 행궁(南漢山城行宮)을 찾았습니다.

행궁은 경기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935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는 조선시대의 행궁지로,

경기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역사·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7년 6월 8일 사적 제480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고증을 통한 복원이 완료되어 개방이 되고있는곳입니다.

 

남한산성의 유적지중 유일하게 입장료가 있는곳이 행궁으로,

기념품을 파는곳을 겸한 매표소를 초가로 지어두어 한결 편하고 정겨움이 있습니다.

 

 

 

 

매표소에 있는 행궁의 관람료 안내이구요,

 

 

 

 

매표소 바로위에는 침괘정으로 오르는 입구의 종각에는 천흥사 동종(天興寺銅鐘)이 있고,

휴일의 한낮여서 인지 남한산성의 종각에서 행궁까지 오가며 전통 취주악을 연주하는 "남한산성 취고수악대"를 만날수 있어서,

마치 취고수악대의 안내를 받으며 행궁으로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행궁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한남루입니다.

앞에 있는 기단은 기존에 있던 것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복원 시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복원했다는,

한남루(漢南樓)는 행궁의 정문으로 행궁 외삼문의 상루입니다.

정조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했다고 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세운 2층 누문으로,

한남(漢南)은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며 앞뒤로 8개의 주련(柱聯)이 있는데 주련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한 성을 지킴에 용과 호랑이의 비법으로

백리 지역을 지키며 맹수와 같은 용사를 보도다

훌륭한 관리는 임금님의 은덕을 널리 퍼뜨리고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인의로 다스리네

이 땅에서 잠업(蠶業)과 보장(保障)을 겸하지만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놀이도 한다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남한산성과 행궁의 위엄과 아픔이 있는 역사를 노래 하는듯 합니다.

 

 

 

 

안내문에 있는 한남루(漢南樓)의 옛모습입니다.

 

 

 

 

한남루의 현판이구요..

 

 

 

 

한남루를 들어서면 장방형의 연못이 보이고 행궁으로 들어섰음을 알게됩니다.

행궁(行宮, Emergency Palace)이란,

왕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조선시대의 행궁은 모두 20여개로 전시기에 걸쳐 조성되고 이용되었는데, 능행, 전란, 휴양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이중 남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 강화행궁 등은 전란을 대비하여 건립한 행궁으로,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는데,

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완공 되었다고 합니다.

 

 

 

 

행궁의 배치도를 먼저 살펴봅니다.

① 한남루(입장) → ② 외삼문북행각 → ③ 외행전 → ④ 통일신라시대건물지 → ⑤ 일장각 →

⑥ 좌승당 → ⑦ 이위정, 후원 → ⑧ 재덕당 → ⑨ 내행전 → 한남루(퇴장) → ⑩ 통일신라와적지

 

서쪽 담의 문으로 일장각(日長閣)과 통하였고 동쪽의 정문이 한남루이고,

하궐지의 규모는 동서 30m, 남북 70m, 전체 면적 2,100㎡(635평)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하궐지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상궐과 하궐을 포함하여 행궁을 구성했던 부속시설로 좌전(左殿), 우실(右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등이 있었는데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습니다.

 

 

 

 

 

외삼문늘을 통하여 행궁으로 들어갑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외행궁으로 들어가는 또하나의 내삼문을 만나게되고,

 

 

 

 

두개의 솟을삼문의 사이는 그리 넓지않은 공간이지만,

남한산성의 옛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진열해놓아 그당시의 모습들을 살펴볼수있게 해두었으며..

 

 

 

 

외삼문의 오른쪽의 작은 누마루와 행랑의 모습이 보이고,

 

 

 

 

행랑옆의 문이 활짝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남한산성과 행궁의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실이 있어 살펴봅니다.

 

 

 

 

전시실에서는 복원된 행궁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수가 있으며,

 

 

 

 

모형으로도 건물의 명칭등을 표기해두어,

행궁의 위치를 알아보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세번째 관문인 내삼문을 지나서 외행전(外行殿)으로 들어옵니다.

 

 

 

 

외행전 앞마당의 한쪽에는 반지하형으로 발굴터가 있으며,

2007년까지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대형 건물터 입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대형 건물터이며 동서 약 18m, 남북 53.5m크기로,

총 290평의 매우 큰 규모로 같이 발견된 기와는 크기가 매우 큰데 무게가 보통의 기와의 4배가 넘어,

암기와는 한 장이 약 19kg이고, 숫키와는 약 15kg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의 중기와가 약 4 kg, 3.3kg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크기와 무게로,

두꺼운 벽과 방충을 위한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의 구조를 볼 때 대체로 창고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며,

또한 2001년 11월에는 이 행궁터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 되었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 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 되기도 하였습니다.

 

 

 

 

외행전(外行殿) 입니다.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곳으로 정당(正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이곳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발굴 되었다고 하며,

병자호란 당시에 외행전 기둥에 청군의 포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궐은 상궐의 외전인 외행전으로서 상궐 동편 삼문 밖에 있으며,

해발 369m로서 상궐지에 비해 약 6m 낮은 위치에 자리해 있는데,

하궐은 상궐과 함께 1624년(인조 2) 총융사 이서(李曙)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 되었습니다.

 

 

 

 

행궁의 오른쪽에는 솟을 외문이 있어 들어가보니,

 

 

 

 

외행전을 바라보며 일장각(日長閣)이 자리해 있습니다.

일장은 산의 이름으로 청량산의 다른 이름으로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로,

유사시에는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이 사용하였을 것으로 유추가 됩니다.

 

 

 

 

일장각(日長閣)의 현판이구요,

 

 

 

 

일장각의 내부의 옛소품들을 배치해둔 모습이며,

 

 

 

 

대청마루에는 나무침상과 죽부인이 놓여져있어,

올라가 무더운 한낮의 시원한 낮잠의 유혹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계절에 따라 문을 내려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거나,

두개의 문을 겹치게한후 위로 들어올려 시원한 바람을 맞아 들일수 있게하는 장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다시 외행전으로 돌아와 내행전으로 향합니다.

내행전으로 들어가는 솟을외문외에 외행전의 바로 뒤에는 외삼문이 따로 있습니다.

 

 

 

 

임금의 침전인 내행전(內行殿) 입니다.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으며 내행전은 임금의 안위를 위해 담으로 둘러쌓아 두었습니다.

 

 

 

 

내행전 중앙마루의 모습으로 어좌가 보이고,

 

 

 

 

왼쪽에 있는 왕의 침전으로,

궁궐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의 삼면은 복도와 길고 작은방으로 둘러싸여 있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침전의 건너편의 방의 모습으로,

세자나 왕비가 사용했슴직한 곳입니다.

 

 

 

 

내행전의 뒤뜰입니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으로,

그 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고,

특히 정조는 남한산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남한산성 사대문 이름을 짓고, 과거시험을 시행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조19년(1795)에는 광주부와 수어청의 이원적 관리체계를 일원화하여 광주유수부로 승격하고, 서울 외곽을 책임지는 군사요충지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내행전의 옆으로는 쪽문이 나있고,

쪽문너머에는 크지않은 규모의 행랑이 있으며..

 

 

 

 

행랑의 뒤쪽에는 내행전을 바라보는 또하나의 전각이 있으며,

 

 

 

 

광주 유수의 집무용 건물인 좌승당(坐勝堂)으로,

이곳 좌승당은 순조17년 광주유수 심상규가 지었다고 합니다.

 

 

 

 

좌승당(坐勝堂)의 현판이구요,

 

 

 

 

좌승당(坐勝堂)의 좌승이란 "앉아서 이긴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내행전으로 되돌아와 반대쪽의 쪽문으로 들어가봅니다.

 

 

 

 

현판이 없는 크지않은 길다란 건물이 자리해 있고,

 

 

 

 

내행전을 보필하는 공간으로 보이는,

시녀나 내관등의 거처로 보이며 한쪽에는 창고가 딸려 있는 모습입니다.

 

 

 

 

내행전의 뒤쪽에 있는 좌덕당(左德堂)입니다.

궁실에 따른 건물로 1688년(숙종 14)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제례의 공간으로 보이는 좌덕당의 내부모습 입니다.

 

 

 

 

1636년 12월(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문무백관등 1만4천명과 50일분의 식량으로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였고,

천혜의 요새를 등에 업고 청태종의 군사들에 맞서 47일간(1636.12.14~1637.01.30간) 항전하다가 항복하였던 곳입니다.

 

 

 

 

후원에 있는 이위정(以威亭)입니다.

이위정은 순조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심상규가 지었으며,

"내가 여기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弧矢)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이찌 천하를 위복(威服)하지 않겠는가!" 라는

추사가 쓴 "이위정기"가 전합니다.

 

 

 

 

이위정(以威亭)의 현판이구요,

 

 

 

 

남한산성의 행궁을 돌아보니옛날 건물은 하나도 없고 모두 복원한 것 뿐인게 아쉬움으로 남슴니다.

 

일제시대에 일본군들이 무기들을 숨겨 두었다는 이유로,

오랜 역사와 유서 깊은 행궁 건축물들을 모두 일거에 폭파 시켰으나,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제의 만행이후 100여 년이 지나 겨우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위정에서 담장 너머로 보이는 좌전의 전경입니다.

좌전(左殿)은 유사시 종묘의 신주(神主)를 옮겨 봉안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로,

병자호란을 통하여 남한산성의 보장처로서 기능이 입증되자 1711년(숙종 37)에 부윤 김치룡이 건립하였으며,

서울 종묘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초기백제와 통일신라의 주장성, 몽고의 고려침입시의 광주성,

그리고 조선의 세종때 시작하여 한말까지 이어온 남한산성과 행궁의 유구한 역사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항쟁의 역사와 잊지 말아야할 아픔이 남아있는 남한산성의 문화재인 행궁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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