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찾은곳은,

제부도 가는 길에 위치해 있으며  정용채 가옥의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

조선후기인 19세기 말에 지어진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초가집을 볼수가 있는곳으로,

 

1800년대 말에 지은 초가집인,

한적한 시골길옆에 자리한 화성 정용래 가옥(華城 鄭用來 家屋)의 모습으로,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세대주의 이름을 따서 "박희석가옥"으로 알려지기도 했던곳입니다.

 

 

 

 


길쪽으로 앞서 나있는 사랑채의 모습으로,

 사랑채는 안채보다 약간 북쪽으로 비껴 놓여 위치해 있습니다.

 

 

 

 

초가지붕 살림집의 사랑채 이지만,

 안쪽으로는 미닫이문과 바깓으로는 여닫이문이 함께두어,

겨울철의 찬바람을 막을수 있도록 해둔 모습여서 한눈에도 중농이상의 주택였슴을 알수가 있습니다.

 

 

 

 

사랑채의 방내부입니다.

 문쪽으로 벽장이 달려 있으며 안마당으로 통하는 문도 나있습니다.

 

 

 


사랑방과 대문건너의 문간방 바깥쪽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남성 중심의 외부 활동을 고려하였슴을 볼수가 있으며,

사랑채의 다양한 기능이  돋보이는곳으로  잘짜여진 평면 구성입니다.

 

 

 

 

초가집 임에도 대문의 구조도 튼실하여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기와집에 못지않습니다.

 

 

 

 

안채로 들어옵니다.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가 합해져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초가의 지붕에서 여러해에 걸쳐 지붕을 이어 왔슴을 알수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초가지붕을 이루었던 "이엉"의 모습도 보입니다. 

 

 

 

 


안방의 대청쪽 모습으로,

한옥을 짓는 목수는 설계도가 없다고 하는데,

기둥을 세우고 가로, 세로로 보와 도리를 연결하여 한 칸을 만드는데  이것이 한옥구조의 기본입니다.

도리가 세 개이면 삼량집, 다섯 개이면 오량집, 일곱 개이면 칠량집 또는 칠량가라고 합니다.

 

 

 

 

대청에는 뒤쪽에는 벽장이 자리해 있는데,

 이곳에는 신주를 모셨던 벽장이라고 전합니다.

 

 

 

 

남쪽 안방의 모습으로,

 짜임새가 아기자기하고 옛날집 치고는 크기도 넉넉합니다.

 

 

 

 

대청을 중심으로 남쪽 안방옆에 자리한 부엌도 들여다 봅니다.

 

 

 

 

안방과 마주하고 있는 건너방의 모습으로,

방의 쪽마루가 아궁이로 인해  대청과는 다른 높이로 올라있슴을 볼수가 있습니다. 

 

 

 

 

건너방의 내부도 들여다 봅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볼 때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고 있어 건립 당시에는 부유한 농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 이에 따라서 한옥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변신 하는지,

이곳 정용래가옥에서 정용채가옥과 대비되는 아기자기함을 볼수가 있습니다.

정용채가옥을 먼저 보고 이곳에 오면  전혀 다른 정서를 담은 건물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건너방과 창고를 지나 뒷마당으로 나가는곳에는 우물이 자리해있고,

 

 

 

 

방의 내부에서와같이 뒷마당에서 보이는 외벽에서도,

굴곡진 목재를 그대로 활용해두어 벽을 더욱 활달하게 디자인하게된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정용래 가옥을 돌아보고 나오니,

집앞에는 노거수 느티나무 한그루가 시원한 그늘로 서있습니다.

 

 

 

 

조선후기에 지어진 초가집이라서 더욱 정감이 가며,

살림집으로 초가지붕이지만 부재의 치목과 짜임새는 견실하며,

간결한 구성이지만 중농 규모의 살림집에서 필요한 공간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갖추어져 있는 모습을 볼수가 있는 화성 정용래 가옥(華城 鄭用來 家屋)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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