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을 여행하면서,

조선후기의 고택으로 독특한 구조를 지닌곳이 있어서 찾아보았습니다.

일몰의 명소로 유명한 궁평항과 멀지 않은곳으로 화성시 서신면의 한적한곳에 자리한 "정용채 가옥(鄭用采 家屋)" 입니다.

뒷산에 기대어 지은 달 모양의 집으로,

대문에서 보면 집은 한쪽만 보여 그리 크게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대가로,

산아래 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니 북쪽 대문에서 보면 장방형의 좁은 쪽만 보이게 되는데,

아래에 있는 정용채 가옥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집의 건물 배치 형태가 한자의 "月(월)" 모양으로

기록대로라면 대문채는 1887년에 세워지고 안채와 사랑채는 그보다 몇십년 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렇게 건물이 따로 지어졌다면 애초 月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수 있어서,

달 모양의 특이한 건물 배치에서 그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들여다 볼수가 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특이하게 마당이 있는 사랑채가 맞이 하는데,

정용채 가옥은 집을 마주보고 있는 안산이 나락을 쌓아둔 노적가리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어,

누대로 재복을 누린다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며,

안채, 사랑채, 바깥채, 안행랑채, 대문간채까지 비교적  보존이 잘되어 있습니다.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규모등으로 보아 이곳을 지은이가 상당한 재력가임에 틀림없지만,

당시 유행하던 사랑채의 누마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쪽마루만 보이지만,

사랑채의 지붕은 격이 높은 팔작지붕이고 기둥을 받친 주춧돌도 정성 들여 다듬은 다듬돌임을 볼수가 있는데,

호쾌하게 드러내어 놓구 자신의 부와 권위를 내세우지 못한 것은 당시의 불안한 치안과 관계가 있는듯 하며, 

또한 그당시의 사회상이 이집의 구조와도 밀접한 영향을 준것으로 여겨집니다.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서양에서처럼 폐쇄적인 살림집이 출현할 조건이 나타날때가 1800년대 말기 그당시로 보아집니다.

 

 

 

 


사랑채의 작은 마루에 보이는 모습으로 사랑채의 기능도 다른 고택들과 사뭇 달라 보이는데,

사랑채가 밖을 차지하고 담장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도록 한 것은 사랑채의 권위 때문이라기보다 안채와 곳간채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여지는데,

대문에서 비켜선 채 출입자를 살피는 사랑채의 위치부터가 그러합니다.

 

 

 

 

 


사랑채의 내부 구조에서도 그의도가 그대로 보여지는데,

사랑의 대청을 건물 한편으로 물리고  방을 안채 쪽으로 바짝 붙여두었습니다.

그리고 사랑방 뒤쪽 툇마루에는 안채와 연결되는 복도를 만들어두어 사실상 두 건물은 하나로 연결했는데,

지붕 또한 사랑마당에서 보면 안채와 구분되지만 뒷마당으로 가서 보면 하나의 지붕으로 되어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곳간채 문도 안채 쪽으로 나 있는데,

마당이 주는 느낌도 사랑마당은 무엇인가 불편하다.

이에 비해 문을 열고 들어가 보이는 안마당은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안성맞춤의 크기로,

이 집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랑채와 안채의 개념을 넘어서 사회 혼란기 부유층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안마당은 장방형으로 안쪽에 안행랑채 7칸이 자리해 있으며,

안채는 칸반통의 3칸 대청이 중심에 자리잡고 방은 그 왼편에 있는데,

직절(直折)하면서 동쪽으로 3칸의 안방과 안방 남쪽의 뒷방이 자리해 있습니다.

 

 

 

 

안채의 대청의 모습으로 마당의 크기도 아담하여 평온감을 주며,

대청마루의 맞은편에는 곳간채의 중심문이 자리해 있슴을 알수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주는 곳으로 방과 부엌이 자리해 있어서,

 

 

 

 

큼직한 부엌을 들여다 봅니다.

맞은편에도 부엌이 있는데 그곳은 현대식으로 개조를 해두어 얼마전까지도 이곳에 사람이 거주했던것으로 보입니다.

 

 

 

 


안채의 대청마루 모습으로,

튼튼하게 잘짜여진 마루의 모습입니다.

 

 

 

 

안채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사진들로,

사진의 주인은 3대를 이어오며 이집을 지키신 분들의 모습입니다.

 

 

 

 

맨위의 사진은 아마도 이집을 지으신 주인으로 보이며,

관복을 입고있어 관직에 있었던 양반가 인듯합니다.

 

 

 

 


마루에서 보이는 방의 모습으로 길고 큰방입니다.

 

 

 

 

안방의 모습으로 다락과 뒤퇴가 있고,

안방과 뒷방문을 열면 쪽마루가 있어서 뒷마당으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안방의 반대쪽인 마루의 오른쪽의 안쪽에는 크지않은 문이 나있고..

 

 

 

 

문을 열고 들여다보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복도가 나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이어주는 이곳 복도에는 고급스러운 우물마루를 깔려있는데,

우물마루는 짧은 널을 가로로 놓고 긴 널을 세로로 놓아 井자 모양으로 만든 마루로,

곳간채에 가려서 바깥사람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한 통로가 배치가 되어있으며,

툇마루의 복도 왼쪽 안쪽에는 꽤 큰 수납공간을 만들어 중요한 재산을 보관할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복도의 문을 열면 사랑채로 바로 연결이 되는데,

결과적으로 정용채가옥의 건축 공간은 철저하게 안채를 중심으로 몰려 있슴을 알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다른곳 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구조로 이 집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문을 잠그는 옛 잠금창치의 모습으로,

이곳 정용채가옥은 한옥의 기본 형태나 구조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사랑채로 통하는 복도앞의 방의 내부 모습입니다.

 

 

 

 

마루의 안쪽에서보이는 뒤주 (斗廚)의 모습으로,

두주(斗廚), 도궤(度櫃), 두도(斗度) 등으로도 불리우는 가구로,

곡물을 보관하는 수장궤(收藏櫃)의 일종으로 통나무로 만들거나 널빤지를 짜서 만듭니다.

 

 

 

 

마루로 오르는 디딤돌과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들도 다듬어 둔 모습입니다.

 

 

 

 

안채에서 우물이 있는 뒷마당으로 통하는 뒷문에는 나무 절구통이 놓여있고, 

 

 

 

 

행랑채의 중문을 지나면 보이는 안채의 뒷마루의 모습으로,

50간이 넘는 대가로 안채, 사랑채, 바깥채, 안행랑채, 대문간채까지가 모두 잘 보존되어 있으며,

주위의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진 19세기말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채의 뒷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가 있고 텃밭도 있습니다.

 

 

 

 

이집의 맨 뒤쪽에는 작은 건물이 따로 서있어 호기심으로 내부를 들여다 봅니다.

 

 

 

 

왼쪽의 문을 열어보면 작은 창고가 있고,

 

 

 

 

정면의 문을열면 화장실입니다.

그리고보면 측간여서 부속건물로 따로이 두었지만,

이집의 배치된 윤곽은 통칭 월(月)자형이라 부르는 길상형(吉祥形)입니다.

 

 

 

 


화성 정용채가옥은 1800년대 중반 해안가의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솟을 대문에는 1887년(고종 24)에 문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안채는 이 문보다 약 50년 더 앞선 가구기법을 보이고 있어 처음 지어진 시기를 19세기 초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달 모양의 특이한 건물 배치에서 당시 시대정신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남다른곳으로,

철저하게 폐쇄적인 부농의 집,  화성의 유적지 "정용채 가옥"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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