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의 유적지를 찾아 나서서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에 위치한 "영모재"를 찾았습니다.

 

영모재(永慕齋) 입니다.

제사를 모시는 재실임에도 특이하게 안채와 행랑채로 구분이 되어 있어,

고택인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행랑채는 1869년(고종 6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시흥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 전합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입구의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하는수 없이 뒷꿈치들 들구서 담장너머로 들여다 봅니다.

튼 "ㅁ"자 형식으로 이루어진 행랑채는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문간채가 마주 보고 있는 형태라고 하는데 들어가 볼수가 없으니 아쉽기만 합니다.

 

 

 

 

안채의 모습입니다.

안채는 잘 다듬은 초석과 기둥과 보, 도리 등의 치목 수법으로,

부드러운 추녀와 시원한 선자연(扇子椽, 부챗살 모양의 서까래)의 면모를 지녀서,

솜씨있는 목수인 "경장(京匠)"의 솜씨로 보여진다고 알려져 있는데 멀치감치서 넘어다 볼뿐입니다.

 

 

 

 

건축 연대와 구조적 독특성이 문화재적 가치로 인정을 받았으며,

2008년 9월에 전통방식에 따라 원형에 맞추어 현재의 모습으로 전면 복원·정비하였습니다.

 

 

 

 

고종 22년(1885)에 건립된 재실인 영모재 입니다.

영모재는 류자신을 모신 사당으로,

류자신(柳自新, 1541~1612)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지언(止彦), 본관은 문화(文化)입니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오른 후 김포 현령, 광주목사, 한성부 판윤,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고,

셋째 딸이 광해군 비(光海君妃)가 되자 문양 부원군(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습니다.

사당뒤에 있는 묘역은 옥녀 국부형(玉女局部形)으로 그의 묘지문에 따르면 시흥 지방의 팔 명당(八明堂)에 속합니다.

 

 

 

 

영모재 뒤편에는 영모재공원이 조성이 되어있어 찾아봅니다.

 

 

 

 

쉬어갈수있는 작은 정자도 있고,

사각형의 연못과 분수도 자리해있으나 물이 없어서 분수도 물을 뿜어내지못합니다.

 

 

 

 

공원의 안쪽에는 두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는데,

왼쪽이 1921년 건립된  "문명석"."조덕준" 자선기념비 이며,

오른쪽의 큰비석이 1932년에 세워진 "낭정호" 송덕비로 두비석 모두 지역의 수혜자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으로,

송덕비는 시흥능곡 택지개발이 되기 전 1932년에 자연 마을인 삼거리 마을 장터에 위치해 있었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방치되다시피 했던 비석을 김규성 씨 등 뜻있는 마을 주민들의 보호로 이곳으로 이전되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낭정호 송덕비로 비문에는,

"낭공정호 송덕비(浪公定鎬 頌德碑)
유아낭공(唯我浪公) 춘경추렴(春耕秋斂)
금세활불(今世活佛) 보급주휼(補給周恤)
소작세민(小作細民) 만구공송(萬口共頌)
영보구명(永保軀命) 재차명비(載此銘碑)"라 쓰여 있으며,

 

번역을 하면,

"낭정호 송덕비
오직 우리 낭공만이 봄에 밭 갈고 가을에 거두시네
현세에 살아있는 부처님같이 도와주시고 두루 구휼해주시네
소작하는 영세민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시네
영원히 몸과 목숨을 보전하시기를 바라며 이 비문에 싣노라
소화7년(1932년 12월) 12월" 이라고 되어 있는데..

 

낭정호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 경까지 살았던 인물로 보이며,

낭정호는 황해도 해주 지방 출신으로 추측되며 영어과 졸업생으로 영어 구사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빨리 받아 들이면서 사업을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 1925년판에 피혁 제품의 원료와 그 부속품을 판매하는 회사인,

유풍상회(裕豊商會(合資))의 사장으로 회사 경영을 통해 축전된 부를 기반으로,

시흥 능곡동 일대 등과 같은 토지를 사들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나눔 활동을 했다고 신문기사등을 통해 알수있으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시흥 능곡동 일대의 전답 소작인들에게도 덕을 베풀었으며,

이에 소작인들은 감사의 뜻으로 송덕비를 건립하였다고 전합니다.

 

 

 

 

 


사당의 뒷산에 "류자신"의 묘소도 있다고 하는데,

안내문이나 이정표도 보이질 않아 내려가는길을 잡습니다.

 

 

 

 

영모재로 되돌아 내려오니,

담장너머에 제법큰 유실수가 한그루 있어 다가가보니..

 

 

 

 

여름을 맞아 속을 살찌우고 있는 "호도" 를 볼수가 있습니다.

 

 

 

 

"영모재" 앞의 너른 마당으로 되돌아 나왔습니다.

문화재인 사당은 문이 굳게 잠궈져있고,

"영모재 공원"이라는 이름이 있슴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렇게 너른 마당을 비워둔채,

방문객의 차를 둘만한 작은 주차공간 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쇠말뚝으로 경계를 두고 있습니다.

 

 

산자락을 따라서 신흥 주택이 들어서고,

마을주민들의 차량은 도로를 따라 길게 세워둔 모습을 보입니다.

이곳 영모재는 시흥시에서 "(사)예명원" 시흥시지회에 위탁관리를 한다고 들었는데,

시에서는 돈을 들여서까지 폐쇄적인 관리를 하여야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시흥의 문화재 "영모재"의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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