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을 여행하면서 찾은곳은

가곡과 동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홍난파의 생가입니다.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여명기를 개척한 난파 홍영후(1898~1941년)의 생가로,

실제 홍난파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니지만 1986년에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집이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의외로 작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단출한 큐모의 초가집으로,

마루는 없으나 마루가 있을 자리는 공간으로 비워져 있고..

 

 

 

 

벽에는 선반을 두어 홍난파의 사진과 꽃을 올려 두었습니다.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아버지 혼준과 어머니 이씨 부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영후, 호는 난파, 본관은 남양으로,

난파는 7세때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 근처에서 살았고 정동감리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서양 음악인 찬송가를 듣고 배웠으며 찬송가는 독보법을 스스로 해독하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뒤 귀국하였으며, 1920년「봉선화」를 작곡하였으며,

1922년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였고 1925년는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소설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는데,

1926년 다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연구하고 1933년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전임하였습니다.

 

1935년부터「백마강의 추억」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는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1936년 흥사단 단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도산 안창호와 함께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이때 받은 고문으로 머리를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1941년 8월 30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 하였습니다.

 

 

 

 

 

단출한 규모의 초가를 둘러보노라면,

어렸을적 누구나 불러 보았을  그의 대표곡이라 할만한 "고향의 봄"이 절로 떠오르게 됩니다.


현재의 생가 건물은 당초 멸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목조 초가 4칸의 ‘ㄱ’자형 구조로,

방 2개와 하나의 부엌으로 단촐하게 구성된 집에는 아담한 마당이 딸려있고,

건물 처마 밑으로 난파의 결혼, 활동상등 자료가되는 사진등이 걸려 있습니다.

 

 

 

 


벽의 한쪽에 마련된 시렁위에는,

 망태기기와 소쿠리등 옛날 생활품들이 올려져있고..

 

 

 

 

왼쪽의 방으로 크기도 작고 소박합니다. 

 

 

 

 

부엌 앞에는 오랫만에 보는 나무절구가 오래된 모습으로 자리해있고,

 

 

 

 

부엌이 딸려있는 방은 조금더 커보이지만 아담한 크기이고,

 

 

 

 

소박한 부엌살림을 말해주듯 부엌 또한 작은편 입니다.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어 환기때문에 설치되어있는 통풍구도 보이고,

그아래엔 선반용도인 시렁의 모습도 눈에 들어 옵니다.

 

 

 

 

집에서 나와 주변을 돌아봅니다.

 

 

 

 

뒷마당이 없는 집의 뒷부분도 살펴보고,

 

 

 

 


뒤돌아서서 홍난파의 생가를 뒤돌아 봅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문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난파"인데,

친일 성향의 글과 작품을 발표한 사실이 근자에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어서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홍난파 생가 마당 앞에는, 

생가를 찾은 이들이 잠시 쉬어갈수 있도록 배려가 있는,  

근자에 지어진듯한 정자가 있어 따뜻함이 전해집니다.


화성의 인물,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 떠올려지는,

홍난파  생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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