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의 약속으로 이천을 다녀오면서,

시간여유가 있어  이천의 문화재 "김좌근 고택"을 찾았습니다.

 

내촌리 소일마을 상단 뒤편에,

나즈막한 산을 끼고 남향으로 자리 잡고있는 김좌근(金左根) 고택입니다.

 

 

 

조선 후기에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고,

안동 김씨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김좌근(1797~1869)의 묘지를 관리하는 한편,  

별장으로도 사용하기 위해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金炳冀)가 1865년(고종 2년)에 지은 것으로,

부친의 사후엔 묘지 관리를 겸한 별장용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99칸이나 되는 대규모 전통 한옥이었으나,

현재는 솟을대문, 담장, 행랑채가 모두 없어지고 안채와 별채등 42칸만이 남아 있는 상태로,

비록 원래의 규모보다 줄어든 상태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통해 조선 후기 권문세가의 가옥 구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랑채로 보이는 별채를 먼저 돌아 봅니다.

바깥쪽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채가 ㉠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지금은 안채와 별채가 서로 떨어져 독립된 두 개의 건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두 건물 사이에서도 가로막힌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 뒤쪽에 널마루로 짠 회랑을 달아서,

왕래가 편하도록 서로 연결된 구조로 마당에 흙을 밟지 않고서도 안채와 별채 사이를 편하게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좌근(金左根, 1797년~186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왕의 외척으로 안동김씨 세도기 후반의 중심인물로,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며 자(字)는 경은(景隱), 호(號)는 하옥(荷屋),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입니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아들이자 김유근의 동생이며,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남동생으로,

익종의 외삼촌이기도 하며  하옥(荷屋)이라는 호(號)때문에 "하옥대감" 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세도가의 배경으로 순탄한 벼슬생활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별채는 안으로 닫혀 있어서 들여다 보지는 못하고,

누마루 옆의 마루에서는 낮은 담장 너머로 집앞에 있었던 연못의 일부를 내려다 볼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기거하지는 않지만,

관리를 잘한듯  집과 마당등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조선후기의 고택을 돌아봄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별채를 한바퀴돌아 뒷편의 모습도 살펴보고..

 

 

 

별채의 창고인듯해 보이는 곳으로,

문위 채광을 위한 창으로 보이는데 창살모양은 만살로 되어있는 모습입니다.

 

 

 

 

세도가 였던 김좌근에게는 나합이라는 애첩의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나합은 구한말 세도가였던 김좌근의 애첩으로 세도정치에서 가장 권세를 부린 여인으로 많은 야화를 남겼는데,

나합은 영산포 삼영동 출신으로  성씨는 양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생출신으로 알려진 "나합" 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입니다.

옛날 합하(閤下)라고 해서, 정1품의 고관들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가 있었는데,

각하와 비슷한 뜻으로 나주 출신기생이 워낙 세도가 당당해 그 ‘합’자를 붙여서 합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고향이 나주라서 나주 합부인, 줄여서 " 나합" 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기 첩이 너무 설친다는 소문을 들은 김좌근이 “사람들이 너를 나합이라고 부른다며?”하고 언짢은 듯 웃자,

“합(閤)이 아니라 합(蛤, 조개. 아들을 낳으면 고추고 딸을 낳으면 조개 즉, 여자를 뜻한다)자를 붙여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라고 변명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합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하지만,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합이 김좌근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을 도왔다 하는데,

그연유로 나주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가 나주 관아 터에 남아 있다고 하며,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永世不忘碑)" 입니다.

 

 

 


안채와 별채를 경계짓는 안채에 딸린 창고벽의 모습으로,

외벽하나까지도 신경써서 집을 지은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단장된 외벽과 창문, 가지런히 내려온 처마에에서,

새삼 우리 고유 한옥의 아름다움을 맛볼수 있는곳입니다.

 

 

 

지금은 별채와 안채 사이에 작은 일각문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별채와 안채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어 땅을 밟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각문을 통하면 안채의 뒷마당으로 들어서게 되지만 별채 쪽으로 되돌아 나와 안채에 들어 섭니다.

 

 

 

안채는 서쪽부터 부엌과 다락, 3개의 방과 곳간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의 일자집의 구조로,

밖에서 보기에는 대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부엌은 3칸 규모로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토를 달았고 오른쪽에 다락이 있는 구조인데,

시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부엌문위의 눈썹모양으로 내어 달아둔 모습이 특이합니다.

 

 

 

안채의 널찍한 안방의 모습으로,

다락으로 오르는 문의 모습과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창이 있습니다.

 

 

 

방과 마루는 문을 들어올려 유사시 하나로 통하게 해두었고..

 

 

 

3개의 방 전면에는 3칸 정도의 널찍한 대청마루가 있는데,

마루의 문을 닫아두어 밖에서 보기에는 쪽마루만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김좌근 고택의 안채 창문으로 창살모양은 만살로,

만살의 모양은 가로와 세로의 선이 교차하여 작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겨울철의 찬바람을 막기위해 이중문을 설치해둔 모습입니다.

 

 

 

바깥쪽의 문은 문고리가 있어서 쉽게 여닫을수가 있지만,

안쪽의 문은 나무문에 홈을 파서 가죽으로 손잡이를 해둔것이 작은것 하나하나에 신경쓴 흔적이 보입니다.

 

 

 

문고리에 장식을 달아둔 세심함도 보여지며,

 

 

 

문의 잠금장치또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곳으로,

기둥과 서까래와 대들보는 물론이고 마루와 각종 문틀이며 문살 하나에 이르기까지 잘 다듬어져서 소홀한 구석이 없습니다.

 

 

 

반듯하게 다듬어 세워둔 주춧돌위에,

홈을내어 마루를 연결하고 기둥으로 올리는등, 이름난 장인의 솜씨가 느껴집니다.

 

 

 

마루의 문을 걸어 올려,

여름의 시원함을 느낄수있는 장치를 눈여겨 보며 마루에서 내려 옵니다.

 

 

 

건너방 옆에 딸린 작은 부엌은 열려 있어 들여다 볼수가 있습니다.

 

 

 

안채의 뒷마당으로 나와 봅니다.

 

 

 

뒷담장 아래의 화단은 가꾸져 있지는 않지만,

목화 한그루가 바람을 이기지 못한듯 비스듬히 누워있습니다.

 

 

 

오랫만에 보는 목화의 꽃입니다.

목회는 붉은색과 흰색 두가지의 꽃을 보았는데 이곳에는 흰색만 보입니다.

 

 

 

목화의 결실인 솜의 모습도 보입니다.

따뜻한 솜이불을 연상케하는 오랫만에 보는 면화의 솜입니다.

 

 

 

고택 전면의 낮은 담장 너머에는,

훤칠하게 자라난 해바라기가 담장 위에서 웃는듯 서있습니다.

 

 

 

2009년 6월 김좌근 후손들은 김좌근 고택과 주변 대지 101,500㎡를 서울대에 기증하였고,

 

 

 

서울대는 체계적인 복원계획을 세우고 발굴작업을 한창 진행 중에 있다고 합니다.

건물은 새로 보수를 한 듯 기와며 벽들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어서 예전 모습을 살펴보기에도 그리 어렵지가 않습니다.

 

 

 

솟을 대문과 담장, 행랑채 등이 없어져 주춧돌만이 남아 아쉬움도 있지만,

고증에 의한 복원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다시보여질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솟을 대문과 담장, 행랑채 등이 없어져 주춧돌만이 남아 아쉬움도 있지만,

고증에 의한 복원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다시보여질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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