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주변의 정자를 찾아서,

무등산 동쪽자락인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있는 정자  환벽당(環碧堂)을 찾았습니다.

 

송강 정철과의 꿈같은 만남으로 알려져 있는곳으로, 

창계천변 길에서 환벽당(環碧堂)으로 오르는 솟을 외문을 들어갑니다.

 

 

 

언덕위에 자리한 정자에 오르려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돌계단을 올라야 하고,

돌계단의 양쪽으로 환하게 피어오른 상사화(꽃무릇)의 군락이 반기고 있어 지루함이 없습니다.

상사화는 추석 무렵에 만개하는 꽃이니 때를 제대로 맞추어 왔나 봅니다.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으로,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었으며, 벽간당(碧澗堂)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遺書石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자의 주인인 김윤제(1501~1572)는 본관이 광산으로, 충효리에서 태어났으며,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교리겸춘추관(承文校理兼春秋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교리(弘文官校理),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가,

나부목사로 있을 당시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송강 정철(松江鄭徹 1536~1593)과 누하당 김성원(樓霞堂 金成遠) 등이 대표적인 제자입니다.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沙村金允悌, 1501~1572)가 낙향후,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有室形)정자로,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류가 흐르며 계곡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으며  특히 이곳은 무등산을 비롯한 원효계곡의 줄기를 따라 자연 풍광이 수려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명승지 였습니다.
 

환벽당 북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증암천 너머에는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이 있으며  환벽당 아래에는 송강과 사촌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곳입니다.
 
면앙 송순(宋純)은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식영정을 건립하고 3년이 지난 뒤,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증암천)안에 세 명승 즉,일동지삼승( 一洞之三勝)이라 합니다.

 

 

 

주춧돌과 디딤돌 모두 자연석을 사용하거나,

조금의 손질로 다듬어 사용했슴을 보여줍니다.

 

 

 

환벽당에는 정철에 대한 일화가 전합니다.

어느날 김윤제가 이곳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釣臺)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조대(釣臺)에 내려가보니 미역을 감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김윤제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외손녀를  소년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소년이 뒤에 정치가로서 또한 문호로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 전합니다.

 

 

 

환벽당(環璧堂)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있는데,

옥고리를 두른 듯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찬미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높다랗게 자리잡은 이 정자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 ~ 1572)가 지었으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고 합니다.

 

 

 

정자의 천정에는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과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임억령의 시를 들여다 봅니다.

이슬비가 숲속을 씻고 가니, 대나무 가마 타고 놀러 갈 만하네.

하늘이 열리고 구름 또한 걷혔고, 골짜기의 물은 넘쳐 흘러가네.

백발은 천 가닥의 눈빛으로 서려있고, 푸른 소나무는 오월에도 가을이네.

개미가 홀연히 구멍을 훌쩍 떠나더니, 생황이란 악기와 학은 영주를 희롱하네.

 

 

 

정자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을 방으로 하여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깐 변형된 형식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후대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사료됩니다.

 

 

 

두칸의 방가운데 작은 벽장이 있는 왼쪽의 방도 들여다 봅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맞아 들이기위해 걸쇠로 문을 들어 올리면,

4개의 문은 천정으로 향하고 문에는 문틀만 남아서 시원함을 더해주지만 공간을 넓게 사용할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은 시원한 풍경으로, 

환벽당이 위치한 곳은 무등산 북능의 능선으로 북봉을 거쳐 꼬막재로 이어지는 여러가지 지맥 중의 하나이며,

사촌 김윤제(1501-1572)가 태어난 충효마을 남쪽 200m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광주와 담양을 경계로 흐르는 증암천(별칭 :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남쪽 무등산에서 북쪽 성산에 이르기까지 산들이 고르게 펼처져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관을 보여줍니다.

 

 

 

이곳에서 식영정과의 거리가 약 250미터 정도 되는데,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와 식영정 주인 김성원이 창계천에 무지개 다리를 놓고 서로 왕래하였다고 전하며,

정철이 14세에 김윤제를 우연히 만나고 27세에 관직에 나갈 때까지 10여 년 동안 유숙 하였던 곳이 이곳 환벽당입니다.

 

 

 

정자 뒤로는 오래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환벽당의 초기모습은 소세양(1486~1562)이 지은 “환벽당“시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를 통해 그 당시의 원림의 식물상과 조경수종을 짐작할 수 있고,

김성원(1525~1597)의 “서하당유고“ 에 ”성산계류탁열도”등의 그림이 남아있어 인문적 가치가 있는곳 입니다.
 
또한 환벽당 관련 시·문은 당대의 일류 문인들로서 임억령, 기대승, 송순, 김인후, 소세양, 정철, 백광훈, 고경명, 권필도, 정홍명, 목장흠,

이은상, 이하곤, 이명한, 김창흡, 조상건, 양경지, 정민하, 서봉령 등 시인묵객의 시가가 전해져 인문학적 가치가 있습니다.

 

 

 

환벽당의 곁에는 보기드문 노거수 매화나무가 한그루 자리해 있고..

 

 

 

정자 아래에는 오래 살은듯한 배롱나무가 보이는데,

 그당시에는 배롱나무가 많아 꽃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정자의 단아래에 보이는  작은연못인 연당이 있어 선비의 상징인 네모난 모양안에 연들이 자라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자미탄(紫薇灘 ; 증암천 ; 창계천)이 흐르고,

그 너머에 무등산에서 성산에 이르는 파노라마 같은 자연 경관을 보여주는 곳 환벽당 입니다.

 

 

 

환벽당 주변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 소쇄공 양산보가 살았던 창암촌이 있으며,

이 마을들 주변으로 식영정(息影亭)과 면앙정(?x仰亭), 송강정(松江亭), 은거를 위한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등,

10여개 정자가 소재해 있어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지역으로서 가치가 뛰어납니다.
 
환벽당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이 드나들던 곳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으며 풍류 문화의 극치를 이룬 조선시대 사림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곳입니다.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볼수있는,  환하게 피어난 상사화 보다 화사한 환벽당(環璧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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