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를 다녀오면서 찾은곳은,

조선시대를 마감하는 한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한국사를 통틀어 아주 독특한 행보를 보여주었던 "명성황후"의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일이 있어 여주에 갔었기에,

명성황후 생가에 도착했을때는 입장 마감직전이라,

명성황후 기념관은 들러보지 못하고 생가를 위주로 돌아보기로 합니다.

 

 

 

솟을삼문과 행랑채가 길게 이어진 명성황후 생가(明成皇后 生家)의 입구의 모습으로,

 

 

 

안내문에서 생가의 배치도를 살펴보고 들어갑니다.

 

 

 

커다란 현판이 결려있는 대문인 일주문은 정면 245㎝에 측면 150㎝의 박공건물(朴工建物)로,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감고당( 感古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과 함께 안채에 딸린 중문채의 모습이 보이고,

 

 

 

이곳 감고당은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가 1851년 태어나 8세까지 살던집으로,

 

 

 

명성황후는 고종 황제의 비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였으나,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비운의 국모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행랑채에 딸린 여러개의 방에는,

 

 

 

행랑채에 기거했던 하인의 모습과,

옛사람들의 물품들을 진열해두어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가마니를 치는틀로 쌀가마니를 칠대에는,

짚에 물을 적신후 나무메로 두드려 부드럽게하여 가마니를 쳤다는 "가마니틀" 입니다.

 

 

 

짚으로 꼬아서  새끼를 만드는 기계로,

기구가 없는집 에서는 손으로 꼬아서 세끼줄을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추수를 할때 쓰는 기구로,

바람이 일게하여 곡식의 알갱이와 쭉정이를 분리해주는 풍채또는 풍구라고도 하는 기구도 있습니다.

 

 

 

"홀태"의 모습으로,

좁고 길게나있는 이사이로 벼,보리등의 가지를넣고 잡아당겨 곡식과 줄기를 분리시켜주는 기구로,

나무발판을 밟아 고정한후 사용합니다.

 

 

 

왕골이나 볏짚등으로 삼이나 자리를 짜는 자리틀로,

장판이 귀했던 옛날에는 자리가 장판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벽면에는 쟁기의 모습도 보입니다.

쟁기는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하여 논,밭을 깊게 갈아 뒤집을때 사용했던 기구로,

농사일에서 가장 많이 쓰이며 중요했던 농기구 중의 하나입니다.

 

 

 


천을 짤때 쓰였던 베틀의 모습도 오랫만에 볼수가 있습니다.

 

 

 

목화송이에서 씨를 제거할 때 사용하는 기구로,

『북학의』에는 '교거(攪車)'로 적혀 있는데  강릉에서는 ‘쌔’라고 하며,

다른 지역에서는 '쐐·쐐기·씨앗이·쒸야·타리개'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는 기구 입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사랑채로,

사랑채에서는 전통 카페로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1687년 (숙종 13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 되었습니다.
 
집의 구조를 보면 넓은 바깥마당에서 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며  그 옆으로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있으며,

안채는 14칸 짜리 민도리집이고 8칸 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 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 구조이며, 날개채는 3량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선후기의 양식을 볼수있는 사랑채를 둘러보고,

 

 

 

아궁이에 불을댄 흔적도 보입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중문채 입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배려가 되어있는 모습이고,

 

 

 

서울 창동에서 옮겨온 감고당 입니다.

명성황후(1851-1895)는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에 부모를 여의고 1866년(고종 3) 왕비로 책봉(冊封)되었습니다.

그녀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浪人)에 의해 경복궁(景福宮)에서 무참하게 피살되는 국모가 살해되는 아픈 역사의 주인공으로,

생가 뒤에는 명성황후 6대조인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1985년에는 생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는데,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구조의 전통을 보여주는곳 입니다.

 

 

 

건평 30여 평의 목조와즙(木造瓦葺)구조의  이 건물은 본래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1688년(숙종 13)에 처음 축조하였는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는 목조 와가 14칸과 맛배지붕 1동과 부속건물 1동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대청(大廳)은 우물 마루이며  ‘ㄱ자형’ 건물로 합각(合閣)지붕에 훗처마인데, 전면은 정면 930㎝와 측면 700㎝이고,

후면은 정면 1320㎝에 측면 1200㎝으로  동쪽 측면은 500㎝에 남측은 390㎝로 정확한 건평은 28.3평입니다.

내부 구조는 큰방 3칸반, 작은방 1칸반, 대청마루 3칸, 주방 3칸, 광 1칸반, 큰방 서쪽 퇴 1칸반, 작은방 남쪽 퇴 반칸 등,

모두 13칸반의 아담한 건물로  정침(正寢)과 일주문(一柱門)이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후기 사대부의 가옥구조를 보여줍니다.

 

 

 

안채의 부엌의 모습으로 부엌의 가구와 기구등을 함께두어 옛날 대가의 부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멍석과 장작, 그리고 그것을 나를수있는 도구인 지개의 모습도 들어옵니다.

 

 

 

널찍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는 부엌의 모습입니다.

 

 

 

대가의 집구조답게 겹처마의 지붕의 모습도 들어오고,

 

 

 

반대편에는  또하나의 작은 부엌이 있어서 들여다 봅니다.

 

 

 

작은 규모의 부엌여서인지 단출하지만 아담해 보입니다.

 

 

 

안채의 문살과 기둥의 하부와 기둥간을 연결하는 곳의 나무장식 에서도 장인의 배려를 볼수있습니다.

 

 

 

 


안채의 뒷마당으로 나와보니,

 

 

 

안채의 아궁이에도 불을 넣은 흔적이 보이며..

 

 

 

굴뚝위의 장식에서도 범상치 않은 집임을 알수있게 해줍니다.

 

 

 

안채를 돌아보고 생가 옆으로 나있는 통로로 나옵니다.

 

 

 

생가의 바로곁에는 소원바위가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이 부인인 한창부부인 한산이씨와 이곳에서 기도를한 효염으로 자식을 얻었는데 그딸이 명성황후라고 전합니다.

 

 

 

생가의 옆에는 민가마을이 있어서, 

초가로 지은 집들이 몇 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후의 늦은시간에다, 문닫을 시간을 이미 넘긴 시점여서 인지 한산한 모습입니다.

 

 

 

주선후기의 마을 모습을 재현해 두었으며,

민속놀이 체험을 할수있는 놀이마당과 간단한 음식을 먹을수 있는 민속주점, 기념품점등이 있습니다.

 

 

 

민가마을에서 나오는 길목에는 또하나의 초가건물이 있어 들여다보니,

 

 

 

소를 이용한 방앗간의 모습으로,

 

 

 


초가지붕을 올릴때 쓰는 이엉의 모습도 보이고,

 

 

 

소나 말을 이용해 물건을 나르는 도구인 수레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방아간을 뒤로하고 왔던길을 되돌아 나옵니다.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는 오전 0900시 부터 1800시(동계 1700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이곳의 관람료는 성인 기준 1,000원이며 주차요금은 대형은 2,000원(중소형은 1,000원)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휴관입니다.

 

 

 

조선조 말기의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격어야 했던,

잊을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비극의 역사 "을미사변"의 아픔을 느낄수있는곳중의 하나로,

여주를 찾으시면 돌아 보아야할  문화재인  명성황후 생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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