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아 터인,  

양주 관아지(楊洲 官衙址)를 찾았습니다.

 

양주 관아를 보기위해 주차를 하고보니,

어디에선가 풍악과 함께 소리하는것이 크게 들리어 가보았더니 "별산대 놀이마당" 공연장으로,

아마도 오늘이 한바탕 놀이마당이 펼쳐 지는날인가 봅니다.

 

 

 

별산대 놀이마당은 앞에서 보기에는 일반적으로 보이나 공연장은 원형으로 조형미가 뛰어납니다.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곳 양주의 유명한 "별산대놀이"를 상징하는듯 조형물이 세워져있고..

 

 

 

산대란 일종의 무대로 가면을 쓰고 벌이는 놀이를 산대놀이라 하는데,

산대놀이 에는 본산대놀이가 있고 약간 별종이라 할 수 있는 별산대놀이가 있는데,

양주 별산대놀이는 한양의 본산대놀이의 이종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본산대놀이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양주별산대놀이" 만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전하는바에 따르며 약 200여 년 전 양주사람 이을축이,

한양 사직골의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이을축"은 양주 최초의 가면 제작가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 입니다.

양주 별산대놀이는 상좌마당, 옴중마당, 먹중마당 등 모두 여덟 마당으로 짜여지며,

연희의 내용은 양반에 대한 풍자, 모욕, 서민생활의 애환 등  당시의 현실폭로 및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을 담고 있습니다.

 

 

 

소리에 이끌려 공연장으로 들어와보니.

별산대놀이의 순서는 알수없으나 공연의 내용으로보아 " 양주농악"을 공연하고 있는듯 합니다.

양주농악(楊州農樂) 두레농악대는 장단에 맞춰 농사일을 즐겁게 하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단합을 통한 작업 능률을 올리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두레패를 중심으로 농악에 맞추어 일을 하면서 농사일의 고단함을 농악과 춤으로 풀었다고 합니다.

 

 

 

양주농악(楊州農樂) 두레농악대의 악기 구성은 꽹과리·북·장구·징·벅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쇠[꽹과리 2~3개], 제금 2~3개, 징 2~3개, 장고 4~5개, 북 4~5개, 소고 8~16개, 잡색[양반, 농부, 아낙] 3~5명,

태평소 1~2개, 무등[남아 1, 여아 1], 기수 6~9명 등 40~60여 명이 공연을 펼치게 됩니다.

 

 

 

양주농악(楊州農樂)은 두레 농악의 소박한 가락을 유지하는 등,

다른 지역 농악과 비교되는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양주농악의 본이름은 "양주고전농악" 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고종 광무 7년(1903년) 농업 장려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농악대회에 참가한 양주의 두레패가,

절기마다 농사짓는 과정을 율동과 춤으로 승화시켜 우승기인 농기를 하사받으면서 널리 인정받았기 때문이며,

옛날부터 내려오던 농악이라 하여 고전농악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공연 중간에 들어와서 내용은 모두 알수없지만,

한마당 펼쳐지는 공연을 볼수있었습니다.

 

 

아이러니 한점은 놀이마당의 위치가 양주관아지 바로곁에 위치한 것입니다.

관아지 바로곁에 양반을 비아냥거리며 기득권층에 비난을 퍼붓는 "별산대놀이마당"이 자리잡은것은 특이합니다,

 

 

 

양주 관아지로 가는길에 보이는 담장의 모습으로,

담쟁이 덩굴에게는 가을이 서둘러 빨리 지나가나 봅니다.

 

 

 

전통그네와 널뛰기를 즐길수있도록 그네의 모습이 들어오고..

 

 

 

별산대놀이마당에서 양주 관아지로 들어오면 만나게되는 비석들입니다. 

나열된 비석들은  송덕비로 양주 인근에 산재되어 있던 송덕비를 한곳을 모아 전시해 놓았다고 하는데,

비석은 모두 18기인데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로 근자에 세운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비석은 "백인걸 선정비"로 선조1년(1567)에 세워 졌는데  그는 양주목사 중에서 가장 청백리라 알려져 있으며 70세에 양주목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복원된 양주 관아(楊洲 官衙) 입니다.

양주 관아지는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417년간 양주목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고 하며 동헌인 매학당(海鶴堂)만 복원이 되어 있는데,

매학당(海鶴堂)은 목사의 정청(政廳)으로 목사가 정무를 보는 외동헌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또한 이곳 양주관아는 1866년 병인박해때 홍성원(아우구스티노), 김윤오(요한), 권 마르타, 김 마리아, 박 서방 등,

다섯명의 천주교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하여 천주교의 치명 순교성지로 신자들이 찾는곳 이기도 합니다.

 

 

 

매학당의 뒤편에는 경기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된  어사대비(御史臺碑)가 있는데,

조선 정조가 활을 쏘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양주목사 이민채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1792년 9월 정조(正租)가 광릉(光陵)에 행차하던 길에,

양주목사가 있던 관아에 3일간 머물면서 시무하여 민정을 살피고,  

이곳 사대(射臺)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며,

임금이 활을 쏘았던 곳이라 하여 비석의 전면에 ‘어사대’라 음각힌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어사대비(御史臺碑) 뒤의 언덕에 정자가 보여서 올라가 봅니다.

 

 

 

아직은 공사가 마무리 단계로보이는 정자로,

시민들의 쉼터로 ㅈ;어진듯 보이며 정자가 있는 이곳에서 능선을 따르면 임꺽정 생가터에 오를수 있습니다.

 

 

 

양주 관아(楊洲 官衙) 일대는 발굴작업이 진행중으로,

순조로운 발굴작업과 복원이 이루어져 양주관아의 옛모습을 되찾는날을 기대해 봅니다.

 

 

 

금화정을 보기위해 가는길에 서있는 장승의 재미있는 모습이 한참을 바라보게 합니다.

 

 

 

금화정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모습으로..

 

 

 

수례를 재현해두고 독서를 즐길수 있게 책방을 꾸며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금화정(金華亭) 입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정조 때 어사대를 세우기 직전으로 추측이 되는 정자로,

금화정의 금은 양주목의 단합을 뜻하며, 화는 아름다운 백성의 뜻을 수용하여 번영을 가져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유양8경(維楊八景)의 제5경으로 양주목사들이 바쁜 정무 중 휴식을 취하며 "관민동락"(官民同樂:관과 민이 함께 즐거운 세상을 만든다)을 의미합니다.

 

 

 

사각정자인 금화정 천정의 우물반자 옆에는 두개의 새둥지가 자리를 잡았네요..

금화정의 금은 양주목의 단합을 뜻하며, 화는 아름다운 백성의 뜻을 수용하여 번영을 가져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의 정자는 1966년 양주시에서 복원을 하였습니다.

 

 

 

정자로 들어오는길의 모습이구요,

 

 

 

정자에서 폭포와 물소리를 즐기기도 했다는데 폭포는 그늘에 가리어 모습이 희미합니다.

 

 

 

금화정 주변에는 바위에 새겨진 몇개의 글이 있는데,

금화동?(金華洞? ) 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나마 볼수가 있으며,

금화정(金華亭)의 위치와 복원에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 바위글 이기도 합니다.

 

 

 

금화정 뒤편에 있는 "은하폭포" 입니다.

여름철 비가온후 폭포수가 떨러지는 광경은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듯 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으로,

가을 가뭄탓인지 수량이 없는 메마른 폭포만 볼수있어서 아쉬움이 큽니다.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양주에는 빨리 찾아오나 봅니다.

 

 

 

복원을 기다리는 양주 관아와,

놀이마당과 더불어 둘레길 조성등으로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부한,

양주의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 할만한 "양주 관아지" 일원의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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