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문화재 답사길 에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자리한 "성령대군 묘"를 찾았습니다.

 

성령대군 묘의 사당인 "대자사"의 솟을 삼문의 모습으로,

이곳은 어린나이에 졸해서 그러한지 태종 이방원의 부성애가 담긴곳이라 합니다.

 

 

 

근자에 묘역을 정비하고 세운 표지석과 비석으로 보입니다.

 

 

 

삼문안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대군의 16대손의 공적비가 서있고..

 

 

 

신도비각도 자리해 있습니다.

 

 

 

비각내부에는 3개의 비석이 나란이 서있는데,  

맨안쪽이 신도비 이며 앞의 2개는 기적비 입니다.

 

 

 

비석들중 안쪽의 신도비로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거북모양의 귀부를 갖추고,

검은 수석으로 된 비신을 화강암 우주석에 끼워 넣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1418년(태종 18)에 세웠으며 비 전체 높이 300cm, 비신 높이 163cm, 폭 130cm, 두께 25cm의 규모로,

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짓고 글씨는 성개가 썼다고 합니다.

 

 

 

 

성령대군의 사당인 대자사 입니다.

태종임금의 아들인 양녕, 효령, 충녕, 성령 4형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들로 회자 되는데,

태종의 맏아들로 뒤를 이을 세자였지만 기이한 행동으로 부왕의 노여움으로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이나,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불교에만 열중했던 효령대군,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에 비해,

막내인 성령대군은 같은 형제임에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태종이 직접 지었다는 대자(大慈:커다란 자비라는 의미 )의 현판으로,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살생과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비정한 임금이 아니라,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떠나 보내고 비통해 하는 필부의 부정이 느껴집니다.

 

 

 

성령대군의 묘로 오르느 길에 보이는 성령대군의 양자인 "원천군 부부"의 묘입니다.

 

 

 

성령대군이 후사없이 죽은 탓에,

후에 충녕대군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성령대군의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으나,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멸문을 당하고 대가 끊기자,

1461년(세조 6)에 다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여,

성령대군의 양자인 원천군 부부의 묘소입니다.

 

 

 

근자에 묘소를 다시 재정비한듯 보이며 둘레석등 예전의 석물과 새로이 더한 석물들이 함께 보입니다.

 

 

 

대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성령대군의 묘입니다.

장대석 3단을 쌓았으며 주위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묘소의 좌우에는 석호와 석양이 세워져 있고 묘 앞에는 상석, 장명등을 두었으며 좌우로는 문인석을 배치하였습니다.

카메라 밧데리 소진으로 폰으로.. ㅠ ㅠ 

 

 

 

태종은 아끼던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친히 제문을 짓고 분묘 옆에 대자암이라는 암자를 세웠다고하는데,

대자암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성령대군 이종은 조선 태종이 3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본 4형제 중 넷째이자 막내아들로서,

1405년에 태어나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태종 14)에 대군이 되었으며 대광보국대부의 위계에 올랐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용모가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공손하며 형제 간에 우애가 깊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학문에도 뜻이 있어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린 아들을 먼저보낸 태종 이방원의 부성애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양의 문화재 "성령대군 묘"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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