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저물어가는 화창한 날씨의 휴일,

고양지역의 문화재를 찾아서 공양왕릉에 들렀다가,

인근에 "수춘군", "문혜대빈묘"가 있슴을 안내해둔 표지로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공양왕릉 앞에서 안내표지를 따라 200여m를 가면,  

표지석과 함께 수춘군과 문혜대빈묘 입구를 볼수가 있습니다.

 

 

 

나무에 가려서 찾아 보아야 보이지만 차량은 더이상 들어갈수 없다고 표지되어 있어,

걸어서 들어가는길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아서인지 길위에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릴정도 입니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  집안의 묘사등 행사때는 주차장으로 사용하는듯 공터가 나오며,

"전주이씨 수춘군 파종회"의 묘지 안내가 있습니다.

 

 

 

안내에는 "문혜대빈묘"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아마도 문중에서 높여 지칭한듯 보이며 수춘군의 후손들이 시신 없는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신단을 모신곳 입니다.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신단(神壇)으로,

현감 양경과 부인 이씨 슬하의 외동딸로 태어나 내명부의 궁인으로 궁에 들어와,

지병으로 병약한 세자를 보살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서 후궁이 되었고,

귀인 첩지를 받게되어  혜빈 양씨의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습니다.

 

 

 

혜빈 양씨(惠嬪 楊氏)에 대해 알아봅니다.

정1품의 빈에 오른 후 혜빈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자식으로는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두었는데,

혜빈 양씨가 영풍군을 키우고 있을때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이튿날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아들인 세자(문종)에게 알려 경혜공주와 단종을 혜빈에게 맡기도록 했습니다.

이에, 혜빈은 기뻐하며 자청했고 단종과 경혜공주를 극진히 보살폈는데.

특히 직접 기른 단종에게는 더욱 지극한 사랑을 주었으며 어린 단종 또한 혜빈의 품에서 잠들기를 늘 원했다고 합니다.

왕이된 이후에도 단종은 혜빈의 처소에서 숙하는 것을 원했으나 수양이 모사를 염려하여 막았습니다.

 

그후 혜빈은 지아비인 세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궐을 나가 산 속으로 들어가 살다가,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여 만에 죽고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산에 있던 혜빈이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되어 단종을 보필 하게 되었습니다.

혜빈이 궁중을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이 문종의 후궁인 홍 귀인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여 혜빈을 대신하게 하자,

혜빈은 더 이상 단종을 보필 할 수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올라,

세조가 혜빈에게 옥새를 요구하였으나 "옥새는 나라의 중한 보물입니다.

선왕(세종)께서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옥새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라며 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끝에 교수형으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1534년(중종 29년)에 장증손자인 호천군의 대궐 앞 상소로 비로소 왕계로 복원이 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4월 28일 관작(官爵)과 봉호(封號)를 회복하여 사후 복권되어 문혜(文惠)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혜빈의 유해는 종조부인 병사공 양치가 남몰래 거두어 포천 기당리 세장산에 묻고 평토를 하여 극비에 부쳤다고 하며,

숙종시 신원 되었으나 묘를 찾지 못하여 단은 이곳 경기 고양시 원당 수춘군 묘역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정조 15년에는 정조의 모친 혜빈 홍씨(혜경궁)와 같은 작호를 피하여 새로 민정이란 시호를 내리고 신주를 새로 만들어 제사 지내게 하였습니다,

 

 

 

혜빈 양씨의 신단의 뒤편에 길지않은 숲길이 나있고 수춘군의 묘역이 있습니다.

 

 

 

묘역으로 이르는 길의 바닥에 돌을 깔아두어 묘역으로 향하는곳임을 되새기게 하나봅니다.

 

 

 

수춘군과 그 후손들의 묘역으로,

 

 

 

묘역을 다시 단장한듯 오래된 석물과 근자에 세운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함께한 모습이 보입니다.

 

 

 

수춘군묘(壽春君墓)와 곁에 함께한 수춘군의 부인 군부인 영일정씨의 묘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석물들이 보이는데 무덤을 보호하기위해 둘린 둘레석은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수춘군 이현(壽春君 玹, 1431년 ~ 1455년)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서자이며 시호는 안도(安悼)입니다.

세종의 서13남(庶13男)으로 생모는 본관이 청주(淸州)인 혜빈 양씨이며 1431년 8월 20일(음력 7월 13일)에 태어났습니다.

정부인으로는 영천군부인 영일 정씨(榮川郡夫人 迎日鄭氏)가 있으며 자녀로는 정부인 정씨가 낳은 장남(양자) 수안군(遂安君) 당이 있고 장녀 이씨가 있습니다.

1437년(세종 19) 12월 8일 수춘군(壽春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 세종이 소헌왕후와 더불어 충청도 온양군 온천에 거둥하게 되었을 때 세종은 광평대군 이여(李璵)와 수춘군 이현에게 궁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1455년(단종 3) 6월 19일(음력 6월 5일) 금성대군 사저인 교거에서 25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병사를 하였습니다.

 

 

 

수춘군의 부인' 군부인 영일 정씨는,

수춘군 사후에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처럼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정업원이라는 승방을 차린 후 정순왕후를 지키고 남편의 명복을 빌며  일생을 보냈다 합니다.

 

 

 

무덤앞에 놓인 두개의 커다란 상석에는 동란의 상처로 보이는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인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소생으로 아들이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1429~1459)로 세조가 즉위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 영풍군(永豊君), 혜빈 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1455년 윤6월 11일에 금산(錦山)에 유배되었고,

아산(牙山)에 이배되었다가 세조 2년인 1456년 음력 6월 27일에는 함양(咸陽)으로 옮겨졌습니다.

함양에서의  방금(防禁)조건이 내려졌으며 1459년 음력 5월 29일 향년 31세로  병사 하였습니다.

둘째는 이곳의 수춘군이며,

세째는 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1434~1456)으로 맏형과 같은 죄목으로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후,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통제하던 형벌) 되었다가,

방금(防禁)조건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으며 1456년 유배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귀양의 방법중 "방금(防禁)조건" 에 대해서 알아 봅니다.

1)난간과 담장 밖에 녹각성(鹿角城 : 사슴의 뿔과 같이 대나무를 짜서 세워 적의 침입을 막는 성)을 설치하고
2)바깥문은 상시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의 음식은 10일에 한 번 급여하고 안에다 우물을 파서 용수를 급여하고 외인으로 하여금 상통하지 못하게 한다.
3)외인이 교통왕래하여 혹 물건을 주는 자는 도당으로 논죄하고
4)수령이 불시에 점검하여 문지기가 비위사실이 있으면 법에 의하여 처벌한다

 

 

 

혜빈 양씨와 그의 소생인  세아들중 수춘군의 의문의 죽음과,

사육신의 난등 단종복권과 관련하여 어머니와 함께 비운의 생을 마쳐야 했던 한남군과 영풍군.

조선왕조 역사의 아픈 부분을 들여다 볼수가 있습니다.

 

 

 

착찹한 마음이 일어 한참을 머물다 수춘군가의 묘역에서 내려옵니다.

 

 

 

묘역에서 내려오다가 비석도 상석조차도 없는 초라한 무덤이 눈에 들어옵니다.

종가의 묘역에 들어 있으니 당연히 수춘군 파종회의 일원이겠지만 아무런 표지석조차 없는 무덤이 궁굼해 집니다.

 

 

 

문화재 답사를 위해 검색을 해보니,

고양지역에는 다른곳에 비해 유난히도 왕릉을 위시해 왕족과 사대부등의 묘역이 많음을 알게 되어,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가 많은 지역이라는 의미도 있는듯 합니다.

우연하게 찾아보게된 수춘군, 문혜대빈묘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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