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져 가는 고려를 바로 세우려다 비운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려말의 명장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를 찾았습니다.

 

충절의 상징인 최영장군 묘소의 입구의 모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의 주차장에서 걸어서 올라 가야합니다.

 

 

 

가을을 보내는 은행잎 낙엽이 양탄자를 깔아 놓은듯 나무아래에 내려앉은 모습입니다.

 

 

 

묘소로 가는 초입부의 모습으로,

 

 

 

산책하기에 적당할 만큼,

그리 힘들지 않는 호젓한 길을 500m정도 들어가야 합니다.

 

 

 

오랫만에 걸어보는 흙길로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아서 인지,

낙엽까지 더해져 호젓함을 만끽할수 있는길 입니다.

 

 

 

산길이 끝나며 돌계단으로 오르는길이 보이며 안내문이 나타나며,

묘소의 입구임을 알리는 석물 표지는 전주이씨 집안의 한분이 세웠다고 전하는데,

지나간 역사 이지만  후손으로서 장군에 대한 죄송함의 발로로 느껴집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했던 고려의 마지막 명장 최영장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돌계단을 오르다 올라온쪽을 내려다 봅니다.

 

 

 

주변의 돌로 공들여 쌓아둔듯한 작은 돌탑이 보이며 너머로 최영장군 묘역이 들어 옵니다.

 

 

 

그리 넓지도, 크지도 않은 단출한 모습의 장군의 묘역으로,

청렴과 충절로 일생을 보냈던 분의 뜻에 부응한듯 검소하게 보여집니다.

 

 

 

앞뒤로 나란이 두개의 봉분이 자리해 있어 윗쪽부터 살펴봅니다.

 

 

 

뒤편 한 계단 위에 자리한 장군의 부친 최원직의 묘 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최영장군 이라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이말은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으며 이러한 사실은 역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입니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문화유씨와의 합장묘이며,

화강암 장대석으로 2단의 호석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방형묘(方形墓)로,

곡장(曲墻)이 둘러쳐진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ㆍ상석ㆍ향로석이 밀착된 채 차례로 놓여 있으며,

그 좌우에는 2기의 묘비가 있고  봉분의 좌측 뒷편에 1기의 충혼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참고를 위해 최영장군의 모습을 가져왔습니다.

 

 

 

무민(武愍) 최영(崔瑩)은 1316년(충숙왕 6) 사헌규정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철원으로,

최영의 집안은 5대조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이후로 대대로 문관에 오른 문벌 가문이었는데,

최영은 젊은 시절부터 풍채가 당당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 무예를 즐겼습니다.

그가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358년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한 것을 비롯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 부터였으며,

1361년에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수복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반란을 평정하는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습니다.

1384년에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명나라가 청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 이서, 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성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혔습니다.

고양ㆍ마산ㆍ충주 등지에 유배 되었다가 1388년에 개성에서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최영장군이 "내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내 묘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유언을 했고,

최영장군의 묘는 1970년대까지 적묘(赤墓)였으나  호우로 인한 흙의 유실을 염려한 후손들이,

흙과 잔디를 계속 갈아줘서 1976년부터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전하는데,

600년이 지나서야 최영장군의 한이 풀려서 풀이 자라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잇습니다.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적과 대치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했던 최영,

그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늘 승리를 쟁취했던 쓰러져가는 고려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요동 정벌의 실패로 몰락했으나 오직 고려를 위해 충신의 도리를 다한 그는 확실히 고려 최후의 명장으로 남았습니다.

 

이곳 산 위에는 장군당(將軍堂)이 있어 무당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최영장군의 사당(祠堂)은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 홍북면의 기봉사(奇峰祠),  추자도 대서리와 남해 미조의 미조진성지에 있는 무민사(일명 장군당)등 여러곳이 있으며,

남해 미조의 무민사의 경우는 장군의 화상이 신상같은 모습으로 봉안되어 장군당으로도 불린다고도 합니다.

 

 

 

올랐던 길을 통해서 되돌아가는 길을 잡습니다.

 

 

 

마을이 끝나며 숲길이 시작되는 초입에 서있는 표지로,

 

 

 

그곳 아래의 계곡에는 커다란 암반이 있고..

 

 

 

참고로 우리나라 무속의 장군 중에는,

임경업장군,남이장군과 함께 최영장군이 한국무속의 주용 장군신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그중 최영장군을 으뜸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큰 바위 아래의 한쪽에는 돌로 쌓은 제단돠 아레의 향로가 보여,

산 위에 있다는 장군당(將軍堂)과 무관해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뛰어난 용맹과 청렴결백, 굳은 절개로 고려의 마지막을 지키려 했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했던 고려의 마지막 명장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가신 분으로, 

"최영장군"의  묘소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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