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초에 이어서 두번째로 "서계 박세당 사랑채"를 찾았습니다.

처음 찾았을떈 문이 닫혀있었고 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고 대답없는 개들의 모습만 보여서 발길을 돌렸는데,

이번엔 다행스럽게도 종손 이신지 젊은종부 이신지는 알수 없으나 다행이 안주인의 배려로 집안으로 들어갈수가 있었습니다.

 

420여년 수령의 노거수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400년의 전통이 숨쉬는 경기도 전통종가 1호로 지정된 서계 박세당 사랑채로,

이곳은 의정부시 수락산 아래에 "노강서원"과 "석림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해 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대지위의 잔디와 잘꾸며진 정원의 모습을 볼수있으며,

이지역을 예전에는 장자동으로 불리웠다고 하는데,

장자동은 덕인장자(德人長者)가 사는 마을이란 의미로 여기서의 덕인장자는 박세당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입구에서 들어가는 길주변에 잘꾸며둔 정원에는 조형물들을 놓아두어 눈길을 잡아주고..

 

 

 

전통정원의 형식을 살린 정원에 현대식 조형물이 함께하여 신,구의 조화를 보입니다.

 

 

 

이곳 주변에서 나온 고 기와를 버리지 않고,

기와 본연의 임무인 지붕으로 재탄생 시켜둔 모습에서 한참을 서있게 합니다.

 

 

 

이곳의 내력을 살펴보면  박세당 생가는 서계의 아버지인 박정(朴炡)이 자리잡은곳으로,

박정(朴炡:1596-1632)은 28세에 인조반정에 참여해, 1625년 인조가 그 공으로 인조반정공신(仁祖反正功臣)의 3등(等)에 책봉하고,

60결(結)에 달하는 방대한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렸다고 합니다.

이곳 수락산 장자동은 땅은 비록 척박했지만 일찍부터 도봉산·삼각산과 더불어 도성 일대 3대 명승지로 이름이 있었고,

수석(水石_과 천류(泉流)의 아름다움이 있어 은거또는 ·강학처로서는 최적의 자리였습니다.

 

 

 

이곳에는 같은 종인듯한 백구가 일가를 이루어 박세당 생가의 일원을 지키고 있는데,

주인과 함께 있을때엔  아주 순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납니다.

 

 

 

서계 박세당 사랑채는 MBC 무한도전, KBS 생생정보통, 굿모닝대한민국, SBS 좋은아침등의 촬영장소로 유명한곳으로,

지금까지 촬영한 방송을 보면 위의것 외에도 생생정보통 미스터리, MBC 우리는 한국인, EBS 요리비전, KBS1 스카우트,

MBC 파워매거진, MBC 기분좋은날, SBS 있다없다, 케이블TV 나라방송 사람과 사람 만남, 채널A 뉴스A, 신대동여지도,

일일이 모두 거론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방송에서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곳 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마주한 도봉산 한눈에 보여 빼어나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수 있는곳 입니다. 

 

 

 

서계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17세기 후반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실학자로 31세가 되던 해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 교리 겸 경연 시독관, 북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렸으며,

외교정책에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1668년 청나라로 보내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서장관으로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장안동에 칩거하여자신의 호를“서계(西溪)”라 하였습니다.

서계라는 그의 호에는 자신보다 먼저 이곳에 살았던 메월당(매월당) 김시습을 흠모하는 정과,

수락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있다고 하며, 

이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는 한편 제자 양성에 주력하면서,

《색경(穡經:농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경서)》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귀중한 사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703년 75세의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이곳 석천에서 살았던 박세당은 진정으로 수락산을 사랑한 선비였습니다.

(서계의 자료집등에서 가져온 자료 입니다)

 

 

 

붕당싸움에 지친 박세당(1629~1703)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 연구와 집필을 하였던 곳으로,

박세당 사랑채는 처음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으나,

6.25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랑채 규모는 정면 5칸 옆면 2칸 반의 규모에 1칸의 누마루가 덧붙어 있어 乙자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는데,

보통 건물의 좌향의 배치에서는 남향이나 남서향, 남동향을 따르는 것에 비해,

이 가옥은 특이하게도 방향보다 배산임수의 자연지세에 따라 배치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랑채 누마루의 현판은 관어정(觀魚停)입니다.

지금의 사랑채 옆의 계곡이 아래로 내려가 있지만,

옛날에는 비가오면 계곡의 물이 누마루 앞까지 들어왔다고 주인께서 설명을해 주십니다.

 

 

 

사랑채에는 누산 편액과 주렴으로,

예서체로 기품이 있어 보이는 누산의 편액은 "다락원 일대에 있는 큰인물을 격찬하는 의미"로,

추사 김정희를 몹시 아꼇으며 옹방강의 친구로 금석학자로 널리 알려진 청나라 엽지선(엽지선)의 글씨이며,



아래의 주련은 "의중유희화동소"로 "뜻에 맞으니 꽃도 따라 활짝 웃고"라는 뜻으로,

기둥에 여러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주련아래에는 해석을 해두어 돌아가며 살펴봄직합니다.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기위해 여닫이와 미닫이로 이중으로 문을 달아둔 문의 모습으로,

문의 크기도  커진모습으로 조선 후기의 고택에서 많이 볼수있는 구조입니다.

 

 

 

사랑채의 정침(正寢, 안방)의 입구에는,

정매당(征邁堂)이라는 당호가 있으며 서계의 8세 종손인 박제경(朴齊敬)의 글씨 입니다.

 

 

 

젊으신 안주인께서 집의 내부도 문을열어 기꺼이 보여주십니다.

내부의 문을 열열자 제일 안쪽 칸과 누마루가 일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수가 있고,

서계 박세당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몰려든 제자들로 누마루까지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채 내부는 관리가 잘되어 있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

이곳을 관리하는 후손들의 정성을 가늠해 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든든한 목재로 잘짜여진 마루의 구조도 살펴보고,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기 좋아 보이는 사랑채의 마루입니다.

서계 박세당 사랑채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학술회의 장소로도 이용이 되고 있으며,

근자에는 알파고와의 대결로 더욱 유명해진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CF 촬영지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사랑채의 누마루의 내부모습으로 3면 모두 4개의 큼직한 창으로 벽을 대신하고 있는데,

 

 

 

창문을 한번 접어서 바깥으로 들어 올린다음 처마 아레의 걸쇠에 걸어 올리면,

누마루의 내부는 모서리의 기둥만 남게되어 주변의 정취를 맘껏 누릴수있는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창문과 마루 사이의 정자의 계자난간과 같은 용도의 낮은 가림막에,

작지만 동그랗게 나있는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볼수가 있는데,

한국동란으로 생긴 총탄의 자욱 이라고 안내를 해주신 젊은 주인분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서계는 이곳에서 1703년(숙종 29) 7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35년을 살며,

수락산과 석천동을 17세기를 대표하는 문화, 학술공간으로 변모시켜 놓았다고 하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인한 고색의 풍취로 옛 선비의 처소로서 고고함과 품격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누마루 너머의 계곡은 가을 가뭄의 영향인지 수량이 많지않아 보입니다.

 

 

 



사랑채의 뒤에는 그리 높지않은 담장 너머에는 사당인 영진각이 있으며,

 

 

 

사당의 담장이 끝나는 사랑채의 옆에는 비어있는 너른 공터를 볼수가 있는데,

이곳이 口형 구조의 안채가 있던곳 이라며 설명을 해줍니다.

 

 

 

서계 박세당과 그의 부친인 박정을 모신사당인 영진각 입니다.

 

 

 

안내를 해주시며 정문은 사용을 하지 않고 있는듯 옆문을 열어 주십니다.

 

 

 

사당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고 찾으신 분들을 위해 방명록이 자리해 있습니다.

 

 

 

사당으로 들어오는 현관과도 같은 곳으로,

1960년경에 지어졌다는 영진각은 구조나 결구의 모습에서,

일제시대의 고택에서 볼수있는 문이나 창문구조등의 모습들을 여러곳에서 볼수가 있습니다.

 

 

 

 


두분의 불천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내부도 열어보여 주십니다.

 

 

 

문위 높은곳에 네모나게 자리한 작은 창입니다.

문을 닫아 두었을때 채광과 더불어 자연환기를 위해 설치해 둔듯 보입니다.

 

 

 

불천위에 오로신 두분의 영정을 모시고,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올리는 곳으로 닫혀있어 영정은 볼수가 없어..

 

 

 

참고를 위해 두분의 모습과 참고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 불천위 :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로. 신주를 조매(祧埋)하지 않고 계속 봉사한다고 하여,

               부조위(不祧位)라 부르는 곳도 있으며, 불천위를 두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고도 부릅니다.

               불천위에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

               혹은 사불천위(私不遷位)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조상의 기제사(忌祭祀)는 4대까지만 봉사하고,

               5대부터는 혼백을 무덤에 묻고 묘사의 대상으로만 하는데 불천위는 계속하여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기제사는 물론 묘사나 시제(時祭)를 지냅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로 지정된  박정(朴炡)의 초상화 2점으로,

녹색의 관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의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녹색 단령본 입니다.

 

 

 

박정(朴炡:1596∼1632)의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이며 본관은 반남으로,

1619년(광해군 11)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 되었습니다.

1631년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오른 뒤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습니다.

 

박정(朴炡)의 초상화는 2점이 전하는데,

한 점은 사모에 청색 단령(團領)을 입은 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이고,

나머지 한 점은 구름무늬가 들어간 녹색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청색 단령본은 훼손이 심해 얼굴과 흉배 부분만이 원본에 해당하며  나머지 부분은 비단을 덧댄 뒤 채색을 다시 입힌 상태로,

녹색 단령본은 청색 단령본의 얼굴을 참고하여 그린 뒤 단령을 바꾸어 그린 이모본 이라고 합니다.

 

 

 

 

왼쪽의 한켠에는 제사를 위한 제례복도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

 

 

 

사당 담장 뒤편으로 올라가면 박세당의 묘역이 보이는데,

서계 박세당(1629-1703)은 17세기 후반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정계를 움직이던 양반사대부들은 숭명배청, 복수설치를 내세우며 주자학으로 중무장하여 다른 사상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 중심에 우암 송시열이 있었습니다.

이때 송시열과 같은 서인계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던 박세당이 나섰고,

그는 비록 주자의 해석이라 해도 모두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 했습니다.

서계는 “대학"과 “중용”을 새롭게 편집하고 해석을 붙인“사변록"을 펴냈으며,

"남화경주해"를 저술하여 유학에서 이단으로 취급했던 장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박세당은 틀에 박혀있던 조선 사상계의 지평을 넓혔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계종택 에서는 고택을 현대인들이 종가체험을 할 수 있게 서계문화재단(031-836-8600)을 만들어,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한옥 체험숙박시설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서계 박세당 고택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서,

다례체험, 숙박체험, 장담그기체험, 그리고 전통혼레식을 치를 수 있으며, 종갓집 요리인 칠첩반상 등을 접해볼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을 내부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신 젊은 부인께서 또다른 고충을 전해주십니다.

 

종가를 개방하여 고택 체험 프로그램등을 진행해보니 특히 숙박체험의 경우,

이곳을 관람차온 방문객과의 접촉이 생겨 사생활의 노출등 불편함을 전하게되어, 

서계 박세당 사랑채를 관람하기 위해서 별도의 입장료는 없지만 서계문화재단에 미리 문의 후 예약을 해야 관람이 용이 합니다.

(서계문화재단 문의전화: 031-836-8600)

 

운이 좋아서인지, 젊은 안주인의 배려 덕분에 경기도를 대표하는 전통종가 1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와 그주변을 답사 할수있게 되어 지면을 통해서나마 고마움을 전합니다.

 

정자와 고택답사를 즐겨해서 많은곳을 다니고 있는데..

사랑채앞 은행나무옆에서 볼수있었던 도봉산의 우람한 풍광과,

배산인 수락산의 가을로 물들어가는 빼어난 경치는 잊혀지지 않을듯 합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가야하는 불편함이 조금도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을곳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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