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에는 가볼곳도 이름난 명소도 많습니다.

성웅으로 추앙 받고있는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와,

중부지방 에서는 쉽게 볼수없는 민속마을인 외암 마을 등이 있습니다.

외암 마을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많이 찾지않는 곳이 맹사성의 고택인 "맹씨행단"입니다.

 

아산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고 싶었던곳이 "맹씨행단" 이다보니,

아침의 신선한 가을공기와 함께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맹사성 고택"을 찾았습니다.

 

 

 

문앞의 안내문을 보고 들어가니 마치 창고와 같은 느낌의 단층건물이 있습니다. 

알고보니 고택을 들어가기전 대문앞에 있는 "청백리 맹사성 기념관"으로,

아직 이른 시간여서 인지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수는 없었습니다.

 

 

 

기념관 뒤편으로 돌계단을 몇개 올라서 들어가는 맹사성의 고택입니다.

 

 

 

작은문을 들어서면 후손인듯 노인이 살고계시는 한옥 한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돌담장이 보이고 위로 오르는 몇개의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합니다.

 

 

 

돌 담장의 입구를 들어서면 너른 마당이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 두그루가 늠름하게 서있습니다.

640 여년의 수령의 은행나무 두그루는 1380년경 맹사성이 은행나무를 심고,

이나무를 보호하기위해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어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을 하던 자리라는 의미로,

이곳을 "행단"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나무는 암은행으로,

꼭대기에는 새에게 새집을 전세 내어주고,

잎을 떨어트린 가지엔 은행열매가 수북히 달렸습니다.

 

 

오른쪽 은행나무는 특이하게도,

2~300년 전부터 원목옆으로 싹이 자라나 지금의 거목으로 자라게 되었으며,

원목은 둥치만 남아 수술을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640년을 살아온 노거수 은행나무 임에도 가을의 결실은 왕성합니다.

 

 

 

마을의 누군가가 바구니에 은행 열매를 담아둔 모습도 보입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 자형의 평면집으로 면적 7,851㎡로,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청백리(淸白吏) 맹사성(孟思誠)집안의 고택(故宅)입니다.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각각 두었는데,

집 안에는 꼭 필요한 것 이상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단출하고 소박한 구조의 집으로,

조선 전기의 주택으로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민가 입니다.

 

 

 

이곳의 주인인 맹사성(孟思誠1360~143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정치인이자 유학자로 자는 자명(自明)이며 호는 고불(古佛)입니다.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로,

138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사람 였습니다.

 

청백리(淸白吏;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435년(세종 17년)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향리인 이곳 온양에서 노후를 보냈습니다.

청백리답게 그의 말년은 소박했다고 전하는데, 

바깥 출입은 언제나처럼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고, 식량은 조정에서녹봉(祿俸)으로 지급하는 녹미(祿米)로 만족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정승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노인인줄 알았다고도 하는데,

세종이 나라 일을 의논하자고 부를 때는 한성에 올라가 국정 자문역할도 하였습니다.

맹사성은 벼슬을 놓은지 3년 뒤인 1438년(세종 20년) 10월 4일,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황희와 함께 세종 시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역으로서,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관리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따뜻한 인간미로 조정 신료들은 물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 였습니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으며,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로 서로 상호 보완적 사이여서,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겨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후세인들은 "맹고불(孟古佛)"이라 하면,

검은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노인을 연상할 정도로 친근한 존재로,

성격이 소탈했던 그는 외출할 때면 소 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습니다.

집에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 했다고 합니다.

 

실록에서는 그를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조정의 큰일이나 관직에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 황희는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과 일화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맹사성은 상대적으로 그 업적이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서의 소박한 삶과 진솔한 인품만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마루에 올라 방믈 들여다 봅니다.

그리 크지않은 방이 깔끔하게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마루 건너의 작은방에는 제례를 위한 제례복이 걸려져 있고..

 

 

 

대청 마루위 기둥위의 구조를 들여다 봅니다.

오래된 옛집임을 알려 주는 복화반 구조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의 모습으로,

꽃쟁반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보여져 복화반이라 합니다.

 

 

 

여름의 시원함을 위해 대청의 문을 들어 올려둔 모습으로,

낮은 기단으로 네모뿔대의 초석(礎石)을 놓아 네모기둥(方柱)을 세운 모습으로,

기둥 위에는 공포(栱包)를 짜 얹었는데 주두(柱頭)는 굽면이 비스듬하고 첨차(檐遮)의 끝은 비스듬히 끊기고,

밑면은 연화두형(蓮花頭形)에 가깝게 초각(草刻)하였습니다.

살미(山彌)는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이들의 모양은 조선시대 초기 공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살펴볼수있는 맹사성 고택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청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앞마당 한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이라고 한듯 하나,

한편으로는 강학(講學)하던 자리였기 때문에 행단으로 이름 지어진곳 입니다.

맹씨행단, 한자그래도 뜻풀이 하자면 "맹씨 집안의 은행나무가 있는 마당" 으로 볼수 있는데,

"행단"은 과거 공자가 은행나무로 만든 단 위에서 강학 한대서 유래되어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루에서 내려와 뒤뜰의 모습도 살펴봅니다.

한단 정도 위쪽에 사당의 모습이 보이고 돌로만 쌓아 놓은 돌담장이 이어집니다.

 

 

 

고택의 뒤편에서 대청마루를 통해 밖을 봅니다.

 

 

 

고택 뒤에 사당으로 세덕사가 있습니다.

 

 

 

양반가의 고택, 종가에서  볼수있는 조상을 모신 사당인 "세덕사"로,

신창 맹씨의 선조인 맹사성과 그의 부친인 맹희도, 조부 맹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세덕사(世德祠) 현판으로,

"대를 이어 쌓아온 미덕을 기리는 사당" 이란 의미로 보여집니다.

 

 

 

이곳 세덕사(世德祠)는,

조선 말기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다른 지역에 있던 서원의 목자재 등을 가져와 지은 사우(祠宇)라고 합니다.

 

 

 

세덕사 뒤편의 처마 아래에 올려둔 나무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 용도가 궁굼하기도 합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집이면 모두 합하여도 12칸이 전부인데,

당대 재상의 살림집 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고 초라한 집입니다.

 

 

 

옆 벽면에 보이는 창문의 모습들로,

용도에 따라 크기와 문살의 모양이 다름을 볼수있습니다.

 

 

 

고택을 나와 돌담 왼편으로 작은 쪽문이 하나 열려있고,

 

 

 

고택의 후문에서 밭사잇길을 150m 걸으면  구괴정(九槐亭)이 있습니다.

 

 

 

언덕위에 자리한 구괴정(九槐亭)입니다.

 

 

 

정자로 오르는 길목에는 긴 세월의 흐름이 힘겨웠는지,

비스듬히 누워 철재의 부축으로 버티고 있는듯한 느티나무의 모습도 보입니다.

 

 

 

구괴정(九槐亭) 입니다.

바깥에는 "삼상당" 이라는 편액이  안쪽에는 "구괴정"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슴 볼수있는데,

 

 

 

이곳에서 삼(三) 정승이 국정을 논의를 하였다고 하여 삼상당 이라고도 불리는데, 

맹사성이 이곳에 살던 때에 그를 자주 찾아오던 황희(黃喜, 1363~1452), 권진(權軫, 1357~1435) 정승이 이곳에서 함께 국정을 논의를 하였다고 얻어진 이름입니다.

 

 

 

정자의 난간을 따라 정자 주위를 한바퀴 돌아봅니다.

 

 

 

정자에 들어서면 삼상당(三相堂)의 현판이 먼저 맞이하고,

 

 

 

안쪽에는 구괴정(九槐亭)의 현판이 있습니다.

세종 때의 정승인 황희, 맹사성, 권진이 느티나무를 세 그루씩 심었다고 하여 붙여진 정자의 이름으로,

아홉그루의 느티나무중 수명이 다하여  지금은 2그루의 느티나무만 살아 남아 이곳의 역사를 들려주는듯 합니다.

남아있는 두그루의 느티나무는 600년도 넘은 세월에 나무속은 썩고  받침대에 의지해 누워있다시피 하며 생명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단청이 아름다운 정자의 천정구조도 살펴보고..

 

 

 

정자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600여년전 인적이 드믄 이곳은  설화산(448m)을 배경으로 앞에 북풍을 막아주는 배방산과,

아래로는 금곡천의 맑은 물이 만궁형으로 흘러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숲에 가리워져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맹사성의 고택이 있는 곳은 소나무의 동산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자를 세워 시문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을 들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던 곳으로,

아쉽게도 당시의 건물은 오래 전에 무너져 내려앉았고  지금의 구괴정은 여러차례에 걸쳐 새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배방면의 들녘이 멀리까지 내려다 보입니다.

 

 

 

600년 이란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아홉그루의 느티나무중, 

살아남은 느티나무는 쇠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하였던 조선의 500년사를 전해 주는듯 합니다.

 

 

 

구괴정에서 내려와  맹씨행단으로 되돌아 가는길에 보이는 모습으로

길게 이어진 돌담장에 어울려  소나무의 굴곡이 멋있게 들어 옵니다.

 

 

 

지나왔던 고택의 후문으로 다시들어 갑니다.

 

 

 

고택을 다시 들어가면서 보이는 모습으로,

낮은 언덕에 돌로 축대를 쌓고 은행나무를 심고 행단을 만들어 두어, 

노거수 은행나무와  긴 돌담이 고택을 둘러싸고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맹사성의 대표작인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살펴 봅니다.

시조(연시조)로.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한가롭게 지내는 삶을 노래하며,

이를 임금의 은혜와 결부시켜 표현한 조선전기 강호가도의 대표적 작품으로,

춘사(春詞)에서는 흥겹고 한가한 풍류적 생활을,

하사(夏詞)에서는 강바람을 맞으며 초당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강호의 생활을,

추사(秋詞)에서는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며 소일하는 즐거움을,

동사(冬詞)에서는 설경을 완상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자연 속에서의 즐거움을 각 계절마다 한 수씩 읊으며 안분지족하는 은사(隱士)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의(忠義) 사상과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사대부들의 소망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고택을 길게 둘러싸고 있는 돌담장이 아름다운 "맹씨행단"은, 

조선의 500년 역사를 대표하는 3대 청백리인 선초삼청(鮮初三淸)에 황희, 류관과 함께 올라있는 맹사성의 고택으로,

노거수 은행나무와 삼정승의 정자 구괴정과 함께 조선초기의 주택구조를 살펴볼수있는 고택이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어,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도 뽑힌 곳이기도 한곳으로,

외암마을과 함께 아산으로의 여행에서 빼놓을수 없는 명소 "맹씨행단과 구괴정"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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