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의 외암 민속마을을 찾으면서,

두가지의 기대감으로 마을을 찾았었는데,

영남의 한밤마을과 낙안읍성에 이어 돌담장의 정취를 즐기기 위함이 하나이고,

또하나는 문화재로 지정 또는, 비지정된 고택들이 마을 하나에 모여 있어서 기대감으로 찾았습니다.

 

외암 마을의 고택들중 가장먼저 찾은 곳은 "감찰댁"으로,

택호의 유래는 알수없으나 옛주인의 관직에서 따온것으로 추측 되는곳 입니다.

 

 

 

맨처음 찾아보는 고택인데 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습니다.

 

 

하는수없이 대문채의 담장 너머로 들여다 봅니다.

잘 가꾸어진 사대부 집의 전형으로 대청 앞의 평주 와 툇보는 사각기둥이며 두 열로 서 있어,

마치 궁궐의 행랑을 보는 듯하며 안채는 ㄱ자형으로 외암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데 모두 볼수가 없습니다.

 

 

 

이곳의 마당은 일반적으로 그다지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농산물을 처리하는 일터인 동시에 경조사가 있을 때 이용하는 장소로 넓게 비워두고 조경은 후원에 두었다고 합니다.

 

 

 

외암리를 대표하는 가옥인 "건재고택" 으로,

이곳 역시 문이 굳게 닫혀있어 들어가 볼수가 없었는데,

 

 

 

건재고택 역시 담장 너머로 들여다 볼수밖에 없습니다.

"영암집" 이라고도 불리는 이 집은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영암 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재고택은 규모가 매우 크며 큰 집과 작은 집이 별개로 배치되어 있는데,

큰 집은 10칸의 ㄱ자형 안채, 5칸의 一자형 사랑채, 8칸의 一자형 문간채가 있으며,

작은 집은 6칸의 ㄱ자형 안채, 7칸의 一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평면 구성은 대체로 안방 구들에서 꺾어져 놓이는 중부 방식이지만,

작은 집 사랑채는 특이하게도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돌담을 따라 돌아 건재고택의 뒤에서의 모습도 멀찌감치 들여다 볼뿐입니다.

 

 

 

 


외암마을의 돌담은 모두 돌로 쌓았는데,

줄눈이나 속흙 채움 없이 막돌로만 쌓아올린 담장이 대부분여서 인지,

속채움 돌담장에 기와까지 올려둔 담장은 다른곳 에서는 보편적인데 이곳 마을에서는 특이하게 보여집니다.

 

 

 


이곳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퇴암 이성렬(退庵 李聖烈, 1888~1973)이 살던 집으로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해서 "교수댁"으로 이름 지어진 집으로,

 

 

 


다행이도 이곳 "교수댁"은 개방되어 있어서 들어가 볼수가 있습니다.

예전의 교수댁은 사랑채는 물론 안채에 연못까지 갖춘 규모였지만,

지금은 사랑채가 사라지고 사랑채 앞은 돌담장으로 꾸며지는 등 크기와 주변 풍경이 모두 변했다고 하는데,

 

 

 


비록 원래의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一"자형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해 두었습니다.

 

 

 

사랑채의 마루에는 주렴과 현판들을 볼수가 있고..

 

 

 

여름날의 시원함을 위해 문을 들어 올려두는 장치로,

고택에서 대청마루나 누마루에서 흔이 볼수있는 전통창호의 들어걸개 장치입니다.

 

 

 


자연석을 이용한 주춧돌과 기둥과 마루의 결구의 모습과 조선후기 양식의 문의 모습도 돌아봅니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솟을 외문이 있고..

 

 

 

사랑채의 문은 겨울철의 찬바람에 대비해 2중으로 해둔 모습입니다.

 

 

 

이곳은 사생활 때문에 사랑채만 공개하는지 안채는 닫혀있어 들여다 볼뿐입니다.

 

 

 

행랑채와 대문채 사이에 담장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의 굴곡이 아름답습니다.

 

 

 

민속마을의 고택들중 격식을 갖춘 몇몇 상류층 집은,

수로의 물을 모아 연못을 조성해 두었는데 "교수댁" 의 사랑채 앞에서도 아담한 연못을 볼수있습니다.

 

 

 

사랑채의 안쪽으로 굽어진 곳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랑채 전면에서 당호를 보았는데,

안쪽으로 굽어진 이곳 방문위 에서도 당호로 어느댁인지 알수있습니다.

 

 

 

사랑채의 뒷편으로 안채의 옆에는 작은 사당이 자리해 있습니다.

 

 

 

돌담장의 길을따라 마을길을 따라 갑니다.

 

 

 

문이 닫혀있는 "참봉댁" 입니다.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인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하였기에 얻은 택호로,

 

 

 

참봉댁은 외암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앞뒤로 나란히 서있어 "二"자형 집으로 정면의 길이는 같으나 측면의 폭은 서로 다르게 지어졌습니다.

 

 

 


이곳은 관리를 하지 않아서인지 마당과 들어가는길이 풀로 덮여있는 모습입니다.

 

 

 

참봉댁 윗쪽에 자리한 "송화댁" 입니다.

이곳 송화댁은 초가집의 대문채가 기와집인 본채와 어울리지 않게 초가집으로 되어 있어,

그이유가 궁굼하지만 안내문등 에서도 그연유를 알길이 없습니다.

 

 

 


초가지붕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분위기가 확연이 달라집니다.

남서향의 대문간에 들어서면 커다란 소나무 사이로 양 갈래의 길을 둔 넓은 정원이 자리해 있는데,

송화댁의 정원은 계곡물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정원을 갖춘 외암마을 사대부가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으로,

이처럼 인공적인 손길을 최대한 절제해 만든 이 정원은 한옥과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한국 전통 정원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송화댁은 외암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이사종의 9세손인 초은 이장현(1779~1841)이 순조 10년(1810) 건설했는데,

그가 송화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습니다.

 

 

 

대문채에서 소공원을 거닐듯 들어오면 만나게 되는 사랑채로,

 

 

 

사랑채의 마루아래 섬돌에 놓여진 고무신이 추억을 불러옵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고려해서 인지 굴뚝이 사랑채의 앞으로 나와있고,

그 길목에 있는 넓은 텃밭도 멀찌감치 눈에 들어 옵니다.

 

 

 

한옥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는데,

외암마을은 많은 집이 정원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외암마을에는 송화댁외에도 참판댁 큰댁과 작은댁,건재고택 , 교수댁 등에 정원이 있으며,

마을로 끌여들인 수로의 물을 연못과 더불어 조경수로 이용하였으며 비가 많이 올 때 수로가 빗물의 배수로 역할을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송화댁 역시 사랑채만 개방이 되어있고,

안채는 사람이 살고있어서 인지 들어가는 문은 닫혀있어 살짝 넘어볼 뿐입니다.

 

 

 

사랑채 꺽여진 바깓부분은 따라 가다보니,

사랑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닫힌문 사이의 담장위는 차양막을 둘러 두었는데,

민속마을로 지정된 이곳 외암마을이 방문객으로 인한 사생활의 노출로 힘들어하는 이곳 주민들의 실상을 대변해 주는듯 합니다.

 

 

 

송화댁은 건재고택이나 교수댁처럼 정자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언덕과 물의 흐름이 주는 자연미가 있고 음양을 주제로 한 조선후기의 반가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곳 입니다.

 

 

 

외암마을에서 비교적 윗쪽에 외암종손댁이 있고,

굳게 닫혀있는 외암댁의 대문 앞에는 불천지위로 모시고 있는 외암 이간 사당(外巖 李柬 祀堂)이 있습니다.

 

 

 

사당의 구조는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전면 열은 툇간 마루입니다.

외암 이간(巍巖 李柬1677~1727)은 조선후기의 학자로.

우암 송시열의학맥을 이은 서인 산림 권상하의 제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학문에 전념한 인물로,

주리적 입장에 서서 태극·오상·천명·본연을 동일하게 보고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 하였으며,

낙론(落論)을 이끌었으며 북학파의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의 극복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777년 이조참판·성균관좨주, 순조 때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외암유고>·<미발변> 등이 있습니다.

 

 

 

대문으로 들어가는 담장의 모습이 특이한 이곳은 "참판댁" 으로,

높이 오른 대문채의 앞으로 돌담이 마치 옹성과 같이 앞으로 나와있어 특이했는데,

 

 

 

문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랑채의 모습으로,

이참판댁은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으로 임금이 하사한 집으로 전하는데,

 

 

 

사랑채의 마루 위에는 고종이 이정렬에게 하사한 '퇴호거사"라는 사호로,

영왕이 9세 때 썻다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의 섬돌과 주춧돌 모두 자연석을 어느정도 다듬어 사용하고 있으며,

 

 

 

사랑채에서 들어온 대문채를 바라보면,

대문채에 행랑이 있어서 눈길을 끌게 합니다.

 

 

 

사랑채의 오른쪽을 돌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이곳에는 퇴호 이정렬의 손자 이득선 씨와 부인 최황규 씨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안채로의 방문은 거절을 하여 들어가 볼수 없습니다.

참판댁 입구엔 연엽주라는 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5대조인 이원집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50년 전쯤, 3년간 가뭄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고초를 생각한 임금이 잡곡밥을 올리고 상에 술이나 유과, 떡 등을 올리지 말라 명했었고,

당시 비서감승이었던 이원집은 임금의 건강을 생각해 몸에 좋고 음료에 가까운 술을 빚어 수라상에 올렸는데 그것이 바로 연엽주 입니다.

 

 

 

외암 마을의 중앙 앞쪽에 자리한 "풍덕댁"의 사랑채 입니다.

이사종의 7세손인 이택주(1721~1775)가 풍덕군수를 지낸 연유로 붙여진 택호로,

 

 

 

사랑채와 안채가 "ㄱ"자와 "ㄴ"로 서로 마주하는 형세로 건물사이가 조금 떨어진 "口"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안채뒤 서쪽에 "一"자형의 창고를 초가 지붕을 따로둔 모습도 보이는데,

집뒤편에 작은 동산이 있다고 하는데 문은 열려 있으나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볼수는 없습니다.

풍덕댁을 들여다 보는것으로,

외암 마을에서의 고택답사를 마무리 하려 합니다.

 

영남과 호남지방에서의 민속마을을 여러곳 돌아보았으나,

다른지역의 입장료를 받는 민속마을에 비해 폐쇄적임을 느끼게 되었는데..

민속마을에 거주하시는분들의 사생활의 노출로인한 마음의 고생등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방문객과 주민들과의이러한 문제는 관청에서 방범을 찾아 고민을 해결해 주어야 겠습니다.

 

외암마을의 제반시설이나 돌담장의 분위기 등,

주변 여건은 나무랄데가 없이 좋았지만 고택의 답사에서는,

대문채만 구경하고 발걸음을 돌리거나 사랑채만 보는것으로 만족해야 하고,

입장료를 받는 민속 마을에서 안채까지 돌아볼수 있는곳은 단한곳도 없었습니다.

 

수도권에서 비교적 근접성이 좋아서,

더욱 많은 방문객이 이곳을 찾아 우리것에 대한 정취를 조금이라도 더느끼고 갈수있도록,

관 에서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고택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일까요?

아쉬움이 남는 아산의 외암 민속마을의 고택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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