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정자 문화재를 찾아,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인 "영주 영훈정(榮州 迎薰亭)"을  찾았습니다.

 

영훈정은 영주 시의회사무실 서쪽의 영주초등학교 담장과 인접한 곳에 있는데,

네비게이션의 주소에 의지해 찾아보니 초등학교 뒷쪽의 마을로 안내를 합니다.

 

 

 


영주초등학교 뒤편에는 마을이 있어,

담장에 소박한 그림들을 그려두어 마을길이 더욱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림의 소재는 주로 어린이 위주로 그려두어 동심을 느끼게 해줍니다.

 

 

 


마을의 작은 주차공간이 있고,

간밤에 내린 떄이른 눈이 살짝 덮여있는 영훈정의 뒷모습이 들어옵니다.

 

 

 

영주초등학교가 보이고 영훈정으로 내려가는길이 있습니다.

 

 

 

영주 영훈정(榮州 迎薰亭)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었으며 관청의 손님을 보내고 맞이하던 건물이며,

1467년(세조 13)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사신(使臣)을 맞이할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로 불리웠습니다.

이후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643년(인조 21년)에 신숙(申淑)이 다시 세우고,

그 후 1910년 일제시대 때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시의회사무실 서쪽의 영주초등학교 담장과 인접한 곳에 남향을 하고 있습니다.


누각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중층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하부 기둥은 덤벙주초위에 12개의 원주(圓柱)를 3열로 배치하였고, 상부는 가운데 기둥없이 10개의 원주를 세웠는데,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바닥은 우물청판을 깔고 마루 끝 가장자리는 난간(欄干)을 설치하여둔 구조 입니다.

 

 

 

영훈정(迎薰亭)의 현판으로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각의 우측 뒷편에 중층에 오를 수 있는 가파른 사다리계단이 설치 되어있어 올라봅니다.

 

 

 

영훈정은 일제강점기 이후 관청의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칸막이를 한 흔적들로 가구(架構)의 결구가 다소 이완되고 일부 퇴락(頹落)되긴 하였지만,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당시의 건축양식을 이해하고 건축 수법을 연구함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어 문화재로 지정 되었습니다.

 

 

 

영훈정에 오르면 또다른 현판이 보이는데 쌍청당(﨎淸堂)의 편액이 있고,

 

 

 

범향정(泛香亭)의 현판도 보입니다.

현판을 한쪽에 모아놓은 것으로 보아서 다른 정자의 현판이거나,

영훈정을 또 다른 명칭으로 불렸을 때 걸었던 현판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영훈정의 내력을 살펴볼수있는 편액도 있습니다.


영훈정의 중건기문을 참고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영천군(영주의 옛날 지명) 남쪽 5리쯤에 정자 하나가 있으니,

지난 선덕연간(宣德年間 1426-1435)에 군수 오천(烏川) 정종소(鄭宗韶) 공이 세워 고을터를 진압하게 한 것이다.

옛날에 남정자(南亭子)라 불렀고 퇴계 이황선생이 영훈정으로 개칭하였다.

중간에 건물이 퇴폐하여 숭정 계미년(1643)에 군수 신속(申洬)이 중수하고 학사(鶴沙) 김응조선생이 기문을 지었다.

이 정자는 철탄산(鐵呑山)을 등지고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읍내 가까이 있으면서도 시끄러운 분위기가 전혀 없고,

한가하고 널찍한 곳에 처하여 사방 들판 경치를 앞에 펼쳐두고 있다.

동서로 왕래하는 여행객들이 여름에 올라서 더위를 씻고 남쪽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가을이 되면 많은 수확을 올린다.

참으로 성스러운 세상에 답답한 마음을 품고 산물이 많은 즐거움을 이 정자에서 볼 수 있다.

군수가 여가에 손님을 데리고 찾아와 술을 마시는데 태학(太學) 상사(上巳)의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순임금의 남풍가(南風歌)를 노래하고,

이어서 주부자의 천년의 거문고 소리 그 뜻 잊지 못 하네 라고 한 구절을 가지고 화답한다.

이로써 답답하고 막힌 기운을 펼쳐 화기를 통하게 하면 정자가 단지 관광지가 될 뿐만 아니라 목민관의 걱정을 나누는데 도움되는 바가 많다.

다만 영천은 산은 척박하고 물길이 높고 정자 또한 물가에 서 있는데,

옛날 정자 아래에 마치 무지개와 같이 서있던 돌다리를 지금에 그 흔적을 찾아 볼 길이 없고 흰모래사장 무성한 잡초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건물도,

위로는 비가 새고 벽으로는 바람이 들이 닥쳐 동서로 무너지고 기울어 고을 사람들이 탄식한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정해년(1827) 봄에 이 고을에 부임하여 그 이튼날 이 정자에 올라 건물이 황폐한 것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듬해 정사가 안정되고 일이 적어지자 이에 목수를 부르고 물자를 준비하여 옛날 건물을 그대로 두고 보수하였다.

썩은 들보를 바꾸어 넣고 흔들거리는 기둥은 새로이 튼튼하게 바로 잡았다.

이로써 날아갈 듯한 지붕과 화려한 편액 등이 백리 산수사이에 빛나고 구름 안개 초목의 아름다운 경치와,

들판에서 갈고 거두는 농부들의 즐거움이 갑절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공사를 다 마치고 고을 부노들을 초빙하여 낙성하니 참으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다.

대저 사물은 흥폐(興廢) 와 성쇠(盛衰)가 있게 마련인데 황폐하여 허물어진 것은 반듯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려 다시 진흥되고 회복되니,

지금 이 정자도 처음에는 화려하였고 중간에 퇴폐하였다가 지금 다시 회복되었으니 이 정자가 훌륭한 군수를 만난 것이 참으로 행운이었다.

게다가 이보다 더 중대한 점이 있으니 우리 영천은 문헌(文獻)이 영남에서 이름난 고을이다.

지금 선비들의 취향이 날로 야박해지고 고을 풍속이 날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마치 큰 집이 기우는듯하다.

한 고을의 정사와 교육 맡은 자로서 개탄하고 진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옛날 석자중(石子重)이 우천재(尤川才)가 되어 학사(學舍)를 중수하니,

자양 주부자가 시를 지어 보내 칭찬하기를 백리에 훈훈한 교화의 바람 그대 덕분에 순박한 풍속 이루었네. 라고 하였다.

나도 이로써 훌륭한 우리 고을 군수를 치하 하려고 한다.

군수가 상량문을 짓고 중간에 나에게 보여주면서 중수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적임자가 아니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1764-1842) 짓다.

 

 

 

 


정자의 마루에 보이는 모습으로,

즐기셨으면 정리를 하시고 가야 마땅 하거늘...

문화재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도 안되지만 방치된 이러한 모습이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데,

영훈정의 관리에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누각에 올라 내려다 보이는 모습으로,

이건을 하여 옛정취를 알아 보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학사(鶴沙) 김응소(金應祖)의 중건기문에 따르면,

"영천(榮川)의 누정가운데 그 아름다움이 영훈정을 따를 데가 없다" 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아름다운 정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다른 자료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사명(使命)을 영접하고 전송하던 곳이다.

선덕연간(宣德年間 1426-1435)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지은것인데 퇴계 선생이 이름 지어 현판을 썼다.

 중간에 무너져 내려 숭정 갑신년(1644)에 군수 신속(申洬)이 중건하였고,

1923년에 군인(郡人 군에 사는 사람)들이 구성산 위에 옮겨 세우고 가학루(駕鶴樓)라 일컬었다. 

본래 가학루가 영훈정의 문루로 지금 있는 영훈정과 같이 있었으나,

1923년에 영주초등학교를 짓느라고 철거하게 되어  구성산으로 옮기면서 영훈정과 분리를 하여 가학루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다.

이로서 영훈정과 구성공원에 있는 가학루는 본래 한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해 줍니다.

 

 

기둥과 보의 결구의 모습도 살펴보구서 정자에서 내려옵니다.

 

 

 

정자와 누각은 정취와 풍류를 즐기려,

풍광이 수려한곳에 자리해 있어야 그 아름다움을 함께할수 있는데,

학교의 담장곁에 이건을 하여 자리해두어 정취가 반감 된것과,

문화재인 누각의 관리가 소홀한 모습이 보여서 아쉬움이 남은 영주의 누각 "영훈정"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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