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차 보령에 왔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서 보령의 "충청수영성"을 찾았습니다.

 

보령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으로,

2009년 8월 24일 수영성 일대 지정면적 12만 5,326㎡이 사적 제501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문으로 서문인 석조아치의 망화문(望華門) 입니다.

 

 


수영성으로 들어 가기전 안내도에서 성의 형태와 위치를 살펴 봅니다.

 

 

 

자료로 남아있는 1872년의 이곳의 모습으로,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돌로 높이 쌓아올린 석성(石城)으로,

충청 수영성이 위치한 오천항은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로 중국, 일본과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방어를 위해 수군이 설치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규모가 커진 수영이 설치되면서 충청도 해안방어의 요충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하였는데,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城)으로 자라(鱉)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둔 해안방어의 요충지였습니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로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는데,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습니다.

 

 


 

서문인 망화문 주위의 성벽 옆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으로 오르면,

 

 

 

충청수영성의 진휼청(賑恤廳)이 있습니다.

 

 

 

진휼청(賑恤廳)의 현판으로,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진휼청(賑恤廳)은,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진휼청 앞의 노거수 팽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천항의 모습으로 고깃배와 낚싯배로 지금도 활발한 항구의 모습입니다.

 

 

 

진휼청 위의 영보정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길을 옆으로 잡아 장교청 객사(將校廳 客舍)를 먼저 찾아 봅니다.

 

 

 

장교청 앞에 있는 삼문(三門)은,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控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내삼문으로,

원래 객사와는 별도의 건물인데 지금은 한자리에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해관(控海館) 내삼문에 있는 현판이며..

 

 


삼문 앞에는 많은 비석들이 서있는데 안내 표지는 없으나 송덕비를 모아 세워둔듯 합니다.

 

 

 

장교청 객사(將校廳 客舍)로 들어가 봅니다.

 

 

 

솟을 외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루의 장교청 객사가 보이고,

 

 

 

장교청 객사(將校廳 客舍)에서는,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禮)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객사의 이름은 운주헌(運籌軒)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은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客舍)로,

 

 

 

너른 마루와 두개의 방이 있습니다.

 

 

 

객사를 돌아보며 뒤쪽으로 나와 봅니다.

 

 

 

객사의 담장 아래에는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고,

 

 

 

동백나무에는 어느새 겨울꽃인  동백꽃이 피고 있습니다.

 

 

 

장교청 객사를 나와 영보정을 보기위해 길을 잡습니다.

 

 

 

영보정으로 가는길에는 이곳 소성마을의 내력을 적어둔 비석이 자리해 있고,

 

 

 

성곽을 따라 영보정(永保亭)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보령 충청수영성을 둘러보니 지금은 성곽 일부가 훼손되어 남아 있는 성은 약 1Km 정도이지만,

바다를 지키는 수영성의 위용을 알아보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충청수영성의 대미인 영보정(永保亭)입니다.

영보정은 수영성에 있는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여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으나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게 되었었는데 영보정(永保亭)은 조선시대 서해의 해군사령부 충청수영성의 대표시설로 137년 만에 복원 되었습니다.

 

 

 


영보정은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정면 6칸, 측면 4칸에 175.44㎡ 규모이며,

1504년(연산군 11) 충청수사 이량(李良)에 의해 창건돼 7차례 중·개수를 거쳤고 이량(李良)에 의해 신건된 후 500여년 만에,

1878년(고종15) 화재로 소실된 이후 137년 만에 다시 복원했습니다.

영보정은 다산 정약용이 “세상에서 호수·바위·정자·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했으며,

채팽윤은 “호서의 많은 산과 물중에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을 만큼 경관이 뛰어나 선비들의 극찬을 받아왔던 누각입니다.


* 이익공: 기둥머리에 두공과 창방에 교차되는 상하 두 개의 쇠서로 짜여진 공포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돈중"작의 "영보정도(永保亭圖)"로 옛날의 정취를 느껴봅니다.

 

 

 

영보정(永保亭)의 현판으로,

영보(永保)는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으로 천험(天險), 인화(人和), 정관지락(亭觀之樂)을 영원히 보존한다는 의미이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군우국지의(忠君憂國之意)를 담고 있습니다.

 

 

 

누각에 오르면 너른 대청마루가 맞이 하고,

 

 

 

영보정은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서읍지(湖西邑誌), 영보정기(永保亭記) 등 고증사료에 창건기록과 중수, 개수의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해동지도(18세기 중엽), 광여도(19세기 전반), 보령부지도(1872년) 등의 고지도에도 그려져 있어 원형복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영보정에서 바라본 동쪽 풍경으로 장교청 객사가 있는 쪽입니다.

 

 

 

북동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갯펄과 보령방조제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북서쪽의 보령 방조제 방향으로 보이는 전경으로,

백사 이항복은 세자가 영보정에 오면 경치에 반해 방탕할 것을 우려해 행차를 막았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이곳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영보정 입니다.

 

 

 

영보정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오천항이,

마치 바다가 아니라 호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으로,

한적한 어촌 풍경이 좋은 곳으로 충청수영성에 올라 옛성터를 둘러보며 아름다운 풍경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좋은 곳입니다.

 

 

 

오천항(鰲川港)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세조 12년(1466년)수영(水營)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던 곳으로,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었는데,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이 되었지만 충청의 해안을 방어하는 사령부 역할을 했음을 실감할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오천수영 수군은 이순신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고립된 진주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충청수사 황진과 휘하의 수군 대부분은 옥쇄를 하게되었고,

이후 오천성은 텅 빈 채로 방치 되다시피 했고 1895년에 수영이 폐지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홍보지구 간척사업으로 제방이 들어선 모습으로,

보령방조제 쪽으로 바라본 풍경은  한가롭고 여유있어 보입니다.

 

 

 

충청수영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U자모양의 포구를 이루고 있는 오천항은 수영성의 지리적 특징과 함께 성벽위에서 내려보는 해안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비경이였다고 합니다.

오천항은 전복, 바지락, 해삼을 비롯한 조개의 집합처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하는 키조개의 산지로 유명해서 오천항에서 다루는 키조개 물량이 1년에 70억원어치나 된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3대 수영중 하나로 손꼽히는 보령의 "충청수영성"으로,

오천항에서 남쪽으로 2km가량 나가면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처형된 순교자를 기리는 갈매못 성지가 있어 함께 돌아봄직 합니다.

시대의 흐름으로 강산이 변하여 옛날 영보정에서의 풍광은 반감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는 "충청수영성의 영보정"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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