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을 여행하면서,

읍내에 있어서 접근성이 용이한곳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

예천 동본리 삼층석탑(醴泉東本里三層石塔)과, 동본리 석조여래입상(東本里石造如來立像)을 찾았습니다.

 

동본리 삼층석탑과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은,

예천읍을 가로지르는 하천인 "한천" 바로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천 동본리 삼층석탑(醴泉東本里三層石塔)으로 보물 제426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탑의 앞에는 한천이 흐르고 있으며, 뒤에는 흑응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 탑과 불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였음이 분명하지만 정확한 사찰의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동본리 삼층석탑(東本里 三層石塔)은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으로

전체 높이 4m, 상층기단 높이 0.7m, 기단 폭이 1.2m인 이 탑은,

기단부(基壇部)는 윗층 기단 아래가 파묻혀 있어서, 원래 기단이 2층인지 1층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며,

현재는 윗면에 경사진 돌이 있고, 기단의 가운데돌을 그 위로 얹고 있습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5단, 3층이 4단인데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두드러지게 큰 점이 독특하며,

지붕돌 추녀의 밑은 반듯한데 마무리부분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한 돌로 되어 남아있지만, 훗날에 보충한듯 하며,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몸돌의 줄어드는 비율과 지붕돌의 크기 등에 짜임새가 있는 아름다운 탑입니다.

 

 

 

 

기단의 가운데돌에 새긴 사천왕상의 조각수법도 형식화되지 않은 멋을 보여주는데,

가운데 돌은 4장의 널돌로 짰는데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해 놓은 모습으로 사천왕은 사방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부처의 4신을 뜻하며,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짜고, 각 층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습니다.

 

 

 

동본리 삼층석탑은 1960년 7월 19일 이 탑을 보수 공사할 때 "금동약사여래입상" 1구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높이 14.9cm, 폭 3.5cm로 사각 좌대 위에 광배를 뒤에 끼고 있고 불상 자체의 높이는 7.1cm로,

이것을 탑의 기단부 1m 지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감정 의뢰 하였으며, 

1973년 12월 문화재 관리국 직영으로 이 탑을 해체하여 원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5m 지점으로 옮겨 복구하고,

보호구역에 철책을 설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이나,

각 부분의 아래에 새긴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탑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신라석탑으로서는 드문 단층기단의 형식을 취한 모습으로 문경·상주 등지에서 유행하던 단층기단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본리 삼층석탑에서 왼쪽으로 뒤쪽에는,

보물 제427호로 지정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東本里 石造如來立像)"이 있습니다.

 

 

 

불상은 높이 3.46m, 어깨 너비 1.14m, 머리 높이 95㎝의 크기로, 

이 석불입상은 단판복련(單瓣覆蓮)이 새겨진 원형 연화좌 위에 직립으로 서 있는데,

하나의 돌로 조각된 독립상으로 평판적인 신체, 큰 머리 등 전체적으로 둔중하며 괴량감(塊量感)에 넘친 모습입니다.

* 괴량감(塊量感) : 입체감과 비슷하나 나타내고자 하는 물체를 덩어리지고 묵중함의 무게가 느껴지도록 표현하는 방법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습니다.

크고 넓적한 육계(肉髻)가 있는 네모반듯하고 풍만한 얼굴에 반쯤 뜬 눈, 넓적한 코, 지그시 웃는 입 등의 모습은 자비로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데,

8세기의 이상화된 얼굴 모습보다는 현저하게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큰 얼굴에 비하여 상체는 작은 편으로 비례가 썩 좋지는 않는편으로 굵고 짧은 목과 좁은 어깨,

짧은 팔 등이 평판적인 가슴과 함께 움츠린 듯하여 다소 위축감이 느껴집니다.

 

 

 

원래 석조여래입상은 무릎 아래가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1960년 신도들에 의해 발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대좌는 땅속에 묻혀 있어서 알 수 없으나,

지상에 노출된 면은 팔각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두 발이 두툼하게 돋을 새김되어 있습니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몸에 붙인 채 옷자락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앞으로 들어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들을 안으로 굽히고 있으며,

어깨에서 거의 평행을 유지하며 복부까지 내려오는 통견의(通肩衣)는 허벅지에서 Y자형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양다리에서 타원형의 동심원을 형성하며 흐르는데,

둔중하고 도식화된 평행한 옷주름 선을 이루고 있어  이러한 형식은 이 불상의 조성 시기를 짐작하게 하여 줍니다.

"우전왕상식 불상양식"(憂塡王像式佛像樣式 : 불상의 옷주름 표현 양식으로 목에 反轉이 있는 통견의 옷주름이 대퇴부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양다리 표면에서 반원형의 주름을 대칭적으로 표현하는 불상 양식)이 오랜 답습을 통하여 도식화된 모습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둔중하게 정지된 모습, 양감 없이 괴량감이 강조되어 있는 신체,

그러면서도 아직 경직화되지는 않은 얼굴 모습, 무겁게 흐르는 옷주름 선 등은,

이 불상이 이상화의 길을 추구하던 8세기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수법을 답습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데,

형식화된 통일신라 말기의 조각 수법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처의 정신성이 잘 표현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이곳의 토지 158평은 소유자의 후손들로부터 희사 받아 낮은 철책을 둘렀으며, 

1960년대의 예천 군청의 "통계연보" 에는 이곳을 "중악사"라 하고 있는데,

동악사와 서악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예천읍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한천(漢川)의 둑방 근처 주택가 옆에 자리한,

보물로 나란히 지정이된 예천의 문화재 동본리 삼층석탑(東本里 三層石塔)과, 동본리 석조여래입상(東本里 石造如來立像)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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