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여행지라면 경주를 빼놓을수 없습니다. 

천년고도 경주에는 가볼곳이 너무나 많지만 많이 알려져 있지않아 한적하기까지 한곳이지만,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 1001곳에 들어있는 곳으로 "서출지(書出池)"가 있습니다.

 

서출지(書出池)는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연못으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는곳 입니다.

 

 

 

일연의『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이 못 근처에서 왕비의 비행(非行)을 알리는 글발이 전해졌다는 고사가 있어,

"글이 나온 연못" 이라는 뜻의 "서출지(書出池)"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10년(서기 488년)에,

정월 보름날 행차로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여 정자에서 잠시 쉬고 있을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하고 말하여  기이하게 여긴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습니다.

까마귀를 따르던 장수가  동남산 양피촌 못가에 이르러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홀연히 이 연못에서  풀옷을 입은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나

"장수께서는 이 글을 왕에게 전하시오" 노인은 글이 써진 봉투를 건넨 뒤 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왕이 봉투를 받아보자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소지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은 일이라 생각하여 열어 보지 않기로 하였는데,

이를 본 나라 일을 예언하는 일관이 아뢰길 "두사람은 평민이고 한사람은 왕을 가리킴이오니 열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이에 왕은, 신하들의 의견도 같아 조언에 따라 봉투를 뜯었고 "사금갑(射琴匣 : 거문고 갑을 쏘아라)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대궐로 간 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고  거문고갑 속에는 왕실에서 불공을 하는 승려가 죽어 있었습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지왕을 해치려한 것이었고  왕비는 곧 사형되었으며 왕은 노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연못은  글이 적힌 봉투가 나온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불리우게 되었는데, 

소지왕 10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0년 전으로,

신라 눌지왕 때에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뜻을 펴지 못했고  

소지왕 시대의 "아도 스님" 역시 불교전파에 실패를 했으며,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입니다.

당시 신라 귀족들은 민속신앙 특히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해 쉽게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곳 입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연못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원지(苑池)가 아니라 마을 밖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으며 "사금갑(射琴匣)"의 전설이 생겨난 뒤 서출지로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서출지(書出池)의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요당(二樂堂)"이 들어 옵니다, 

조선시대에 임적(任勣)이 연못가에 정자를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는 곳으로,

이 지역의 세족인 "임적"은  서출지가에 정자를 짓고 "앞에는 연못, 뒤에는 아름다운 남산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집" 이라는 뜻으로 "이요당(二樂堂)" 이라 현판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요당(二樂堂)은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任勣)이 지은 건물로,

연못에 돌을 쌓아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당초에는 3칸 규모였으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는 정면4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ㄱ"자 모양의 누마루가 있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사랑채의 건물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요당(二樂堂)은 보수중여서 안으로 들어가 볼수는 없지만,  

물위에 떠있듯 누마루가 돌출된 팔작지붕의 건물로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물규모는 크지 않지만 연못에 돌을 쌓아 건물을 올렸기때문에 서출지와 함께 운치있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여름철에는 서출지의 하이라이트인 연꽃과 배롱나무의 백일홍을 만나볼수 있다고 하며..

 

 

 

이요당의 주인인 "임적"은 가뭄이 심했을 때,

땅 밑의 물줄기를 찾아내어 이웃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덕망이 높았다고 전합니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임에도..

 

 

 

서출지(書出池) 변의 개나리 군락에는 철없는 개나리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천년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임적(任勣)의 애민의 정신이 남아있는 우아한 정자이요당(二樂堂)과,

연못을 가득메운 연꽃과 배롱나무꽃을 함께 즐길수 있는 곳여서, 

여름이 접어드는 시기에 다시 찾고 싶은곳으로 남은  경주의 서출지(書出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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