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를 여행 하면서, 

오계서원(迂溪書院)과  군자정(君子亭)을 찾았습니다,

 

오계서원(迂溪書院)과 군자정(君子亭)의 모습으로,

영주에서의 여행 일정중 마무리 하는곳여서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이덕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현종 6년(1665)에 지은 오계서원이 있어 먼저 살펴 봅니다.

 

 

 

오계서원은 1570년(선조 3) 간재 이덕홍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으로,

정사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자 1600년(선조 33)에 이덕홍의 장남인 이시가 쌍계마을로 이건하고 한호의 글씨로 관성재·관서헌의 편액을 걸었으며,

1665(현종 6)에 이덕홍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존사를 건립하였습니다.

 

 

 

오계서원(汚溪書院)으로 들어서는 솟을 외문의 현판인 입도문(入道門)의 현판입니다.

 

 

 

"입도문(入道門)"은 닫혀있어 들어가 볼수가 없고,

 

 

 

담장 너머로 기웃 거리며 살펴봅니다.

도존사를 건립한후 1691년에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 침수 피해가 있자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복향하였고, 1978년에 도존사를 재건 하였습니다.

입도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뒤편 다소 높은 지대에 명륜당이, 

앞쪽 좌우측에 동재 관성재와 서재 험위료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동재인 관성재(觀省齋)는 송나라의 학자 장식이 주자에게 ‘동정상수 체용불리(動靜相須 體用不離)’라는 글을 보내자,

주자가 좌우(座右)에 써서 ‘출입관성(出入觀省)’ 한 데서 취한 것으로 편액의 글씨는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썼다고 합니다.

 

 

 

서재인 험위료(驗爲寮)는 응사(應事)에 ‘사지사응 즉험우위(事至斯應 則驗于爲 :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라는,

구절에서 취하였으며 편액은 역시 한석봉의 글씨로 알고 있으나 들여다 볼수가 없습니다.

 

 

 

오계서원(汚溪書院)의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으로,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도존사(道尊祠), 강당, 관성재(觀省齋), 험위료(驗爲寮),

내삼문, 입도문(入道門), 군자정(君子亭), 전사청, 주소(廚所) 등이 있습니다.

 

 

 

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講學) 공간인 강당(講堂)이 있고,

후면에 제향(祭享) 공간인 사우(祠宇)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오계서원에는 책판 300장과 각종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고 전해지는데 상당수 분실한 후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위탁 관리 중이라 합니다.

 

 

 

명륜당(明倫堂)뒤에 자리한 도존사(道尊祠)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사우(祠宇)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이덕홍(李德弘)의 아들인 이시(
李蒔, 1569~1636)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經史(경사)를 통달 하였다고 하며 아버지의 道(도)를 굽혀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학업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글 중, "사람이 순풍에 돛을 단다면 험한 길도 쉽게 갈 수 있지만 출발을 잘못하여 폭풍우를 만나면 배는 뒤집히고 사공은 익사한다"는

국문시조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가 유명합니다.

 

 

 

오계서원에서 오른쪽의 군자정(君子亭)으로 나옵니다.

 

 

 

천원지방의 네모난 연못을 앞에둔 군자정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있는 정자로  오계서원 아랫쪽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군자정은 영남 사림의 종장(宗匠)인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학문적 저술을 많이 남긴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학문을 닦던 정자로서 조선 선조 3년(1570)에 창건되었습니다.

 

 

 

 

자연석 기단 위에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건물의 왼쪽 2칸은 通間(통간)으로 된 마루방으로 되어 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마루방은 3면이 板璧(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 세살문을 설치하고 측면과 후면에는 널문을 설치하였으며,

기둥은 온돌방 부분에는 사각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방 부분에는 둥근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군자정(君子亭)의 현판으로,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현판을 써주어었다고 전합니다. 

 

 

군자정(君子亭)의 정면에 내려보이는 군자당(君子塘)이란 연못으로,

선비사상인 천원지방을 표현한 것으로 네모난 모양으로 땅을 표현하였습니다.

 

 

 

정자의 주인인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이며,

1541년(중종 36) 영천(榮川) 남촌(南村) 구룡동(九龍洞 : 현재의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녹동) 외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세에 금난수(琴蘭秀)의 주선으로 퇴계 이황 선생을 뵙고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으며,

30세 때에 스승의 명으로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여 천리연구에 활용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귀향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관동을 경유하여 용강산성에 이르러 왕세자(광해군)를 배알하고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올렸고,

다음해 정월에 행재소에서 임금에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소를 올렸는데,

이 소에서 육지에서는 구갑거(龜甲車)를, 바다에서는 구갑선(龜甲船)을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말미에 첨부된 구갑선도(龜甲船圖)는 우리나라 최초의 거북선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서로는 『주역질의(周易質疑)』·『사서질의(四書質疑)』·『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간재집』 등이 있습니다.

 

 

 

이 정자는 조선시대 사림의 전형적인 형태의 정자(亭子)로,

1636년의 대홍수로 인해 숙종 37년(1711), 이덕홍을 배향하고 있는 오계서원(汚溪書院)이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함께 현 위치로 이건(移建) 되었습니다.

 

 


 

대를 이은 가학으로 알려진 이덕홍(李德弘)과 이시(李蒔) 부자로,

이덕홍의 아들인 이시(李蒔, 1569∼1636)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오堂)입니다.

이덕홍의 장남으로 오천 본가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습니다.

일찍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어지러운 과장(科場)의 모습을 보고는,

도를 굽혀 명예를 따르지 말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을 단념하고 학업에 전념하였습니다.

그가 오계서당에서 성학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스승 정구(鄭逑)와 학우 장현광(張顯光)이 찾아와,

"대를 이은 가학"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이시(李蒔)는 역리와 도학에 정통하여 앞일을 예지하는 경지에 이르러,

광해군 때 당쟁이 극심해지자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생 4형제와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였였는데,

인조반정으로 아우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36년(인조 14) 세상을 떠났습니다.

1724년 오계서원에 배향(1724년)되었고 유고로 『선오당일고』가 있습니다.

 

 

 

이덕홍(李德弘)과 이시(李蒔) 부자의 대를이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배여있는

영주의 문화재인 오계서원(汚溪書院)과 그들의 정자 군자정(君子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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