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을 여행하면서,

나무를 심어 후손을 발복케 하였다는 예천의 정자로,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에 있는 예천 삼수정(三樹亭)을 찾았습니다.

 

낙동강면의 불룩하게 오른 언덕위에,

커다란 나무들에게 둘러쌓여 고고한 자태로 앉아있는 삼수정(三樹亭)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삼수정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세운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큰비석이 서있고,

 

 

 

완담칠현(浣潭七賢) 사적비(事跡碑)로,

삼수공의 옛집터와 집터뒤에 완담서원이 설립된곳으로 완담서원에 제향된 칠현(七賢)의 사적비이며,

칠현(七賢)은 정귀령(鄭龜齡)과 아들 옹(雍)과 사(賜), 손자 환(渙)과 광필(光弼), 칠대손 영후(榮後)와 영방(榮邦)으로 일곱분의 사적을 기록한 비 입니다.

 

 

 

자료를 살펴보면 완담지(浣潭誌) 삼수편(三樹篇)과 용궁현지 유현록(儒賢錄) 등에서 삼수 정귀령에 대해서 살펴 볼수가 있는데,

승훈랑 관직에 있던 삼수 정귀령이 세종 6년(1424) 9월에 결성현감(結城縣監:충남 홍성군)에 부임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사임하였는데,

 그는 비록 짧은 근무기간였지만 고을을 잘 다스린 공덕으로 송덕비(頌德碑)가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동래정씨의 가록(家錄)인 택지록(宅址錄)에는,

 

"삼수"가 벼슬을 그만두고 용궁고을 남쪽 포구안 별곡마을에 터를 잡게 되니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라는 기록이 있어, 

 

이는 아마도 관직을 떠나 조부를 따라서 안동 구담(九潭)으로 낙향하였다가 별곡에 터를 정하여 삶으로써,

 

동래정씨 별곡마을 입향조가 된 것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삼수는 옛 집터의 동남쪽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槐)를 심고 거기에 정자를 세워 삼수정(三樹亭)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는데,

회화나무를 집주변에 심은 역사는 멀리 상고시대 주(周)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나라가 조정에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三公)의 자리를 정하였다고 하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 그루 회화나무는 삼공벼슬을 상징하는 의미로 전하여 내려와,

 

자손들이 삼공에 들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심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삼수가 그러한 염원으로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었던 것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삼수의 12세손 정재원(鄭在源)씨가 증언하는 가전(家傳)에 의하면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삼수정이 무너지고 세 그루의 회화나무도 시들어 죽었는데 삼수정이 중건되고 난 후에,

세 그루 중 한그루에서 움이 돋아나와 성장한 것이 현재에 남아있는 고목(古木)의 회화나무라고 합니다.

 

뜻을 두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삼수의 자손으로 정씨문중에서 말하는 소위 '사세 칠현(四世七賢)'이 배출 되었습니다.

 

 

 

 

일각문을 앞에둔 삼수정(三樹亭)으로, 

낙동강이 굽이도는 연안(별실)마을 언덕위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424년 결성현감을 지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1425년에 관직을 사임하고

이곳 별실촌에 입향하여 완담칠현 사적비가 있는곳에 사저를 신축하고 후원에 정자를 지어 삼수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635년 병자호란 뒤인 1636년에 폐하였다가 1829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한 정기선(鄭基善)에 의해 중건되었고,

그 후 세 차례 이건하였으나 1909년에 구기(舊基)에 다시 돌아와 중건되었습니다.

정자의 뜰에는 3그루의 회나무를 심어 자손의 번영을 도모했던곳으로 그 뒤 정자가 허물어지니 3그루의 회나무도 고사하였다고 하며,

정자를 복원하니 한그루 회나무 뿌리에서 움이 돋아 지금까지 살아났으니 충남 홍성군 결성면 옛 결성현 관아에 있는 신목과 연륜이 같다고 하며,

지금은 회화나무 3그루 중 1그루만 회생하여 살아 남아 있습니다.

 

 

 

삼수정(三樹亭)의 현판으로 상주목사를 지낸 정현(鄭玹) 의 글씨이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정귀령(鄭龜齡)의 후손으로,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삼수정기(三樹亭記) 편액(扁額)을 비롯하여,

 

 

 

1420년대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의 삼수정운(三樹亭韻) 편액(扁額)과,

 

 

 

삼수정상량문(三樹亭上樑文) 편액(扁額)이 있으며,

 

 

 

결성선조삼수정이십운(結城先祖三樹亭二十韻) 편액(扁額)도 보이며,

 

 

 

곁에는 근차(謹次)  결성선조삼수정이십운(結城先祖三樹亭二十韻) 편액(扁額)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수정(三樹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6칸규모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구조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후에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는데,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중건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이건(移建) 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09년경 옛터에 다시 세운 것으로 삼수정이 오늘날까지 전함은 오직 자손들이 조상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입니다.

 

 

 

삼수정에 올라보니 경북 김천시 구성면의 애틋한 사연이 있는 "방초정" 이 생각납니다.

방초정의 규모는 훨씬 크지만 마루 가운데에 방이 있었고 사방에 문을 달아놓은 구조로,

영남지방에서는 보기힘든 형태로 호남지역에서는 더러 보이는 평면구조 입니다.

 

 

 

또하나 삼수정의 특이한점은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왼쪽의 바깥쪽의 기둥 3개는 유일하게 마루위까지 돌기둥이 올라와 있으며 높이도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6칸의 삼수정은 모두가 마루이고 방은 마루의 중앙에 위치해 한칸으로 단출하며,

김천의 방초정은 온돌이나 이곳 삼수정은 온돌이 아닌 마루방의 구조입니다.

 

 

 

정자의 뒷벽으로 막아둔 나무판재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마을 산등성이에 자리한 삼수정은,

방이 탁 트인 경관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정자 마루에서 조망이되는 낙동강의 풍경으로,

노거수 회화나무와 소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더욱 운치있는 풍광을 전해줍니다.

 

 

 

정자의 주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정6품 승훈랑(承訓郞)으로서,

1424년(세종6년) 9월 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곧 벼슬을 내려놓고 이곳에 자리잡았는데, 

모란은 부귀(富貴)를, 석류는 다산(多産)을, 소나무는 절개(節槪)를, 회화나무는 학자나 정승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삼수(三樹)의 세그루 회화나무는 일순간의 이익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성실과 정직과 진실의 가치관 정신에서 나온것으로 보입니다.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80세 생신 때 이 정자에서 잔치를 베풀며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복을 벗어 이곳의 세그루의 회화나무에 걸어 놓으니 울긋불긋 오색꽃이 핀 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하는데,  

그 후 200년을 무성하게 자라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이후 차츰 잎이 시들고 고사 하였는데,

그중 한그루가 곁가지를 소생(蘇生)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이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소나무 세 그루가 자생(自生)하여 수백년의 연륜과 푸르름을 자랑하며 고고(孤孤)하게 서있습니다.

삼수(三樹)는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지보면 마산리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모셨습니다.

 

 

 

삼수 정귀령이 정자를 지을 당시 심은 세그루 회화나무 중 한 그루만 다시 회생하여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옆에 세 그루의 잘 생긴 노송이 서 있어 혹자는 이곳의 소나무 세 그루가 정자 이름과 관련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세월과 환란을 거치며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창을 거듭하며,

약속이나 한듯 정자의 부활에 시작을 같이했던 회화나무도 회생하는 기연을 보여준,

낙동강을 내려다 보는 예천의 아름다운 정자 "삼수정(三樹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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