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를 여행하면서,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의 "금선정(錦仙亭)"을 찾았습니다.

 

금선정(錦仙亭)은 풍기읍 금계리 장생이 마을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나라의 환란이 피해간다는 정감록의 십승지 중 제1승지에 꼽힌다는 곳입니다.

 

 

 

장생이 마을의 또다른 이름은 "장선마을"로,

생긴모양이 긴배 같다고해서 장선(長船)이라 불렀다가 착한사람이 많이나서 장선(長善)으로 고쳐 불렀다고도 합니다.

 

 

 

장생이 마을 입구에는 장승과 물레방아간을 볼수가 있는데,

 

 

 

이곳의 물레방아는 현 황기진 이장의 조부때부터 물레방아간을 경영 하였는데,

기계화와 산업화에 밀려 사라졌지만 고향의 정취를 느낄수 있게 마을입구에 세웠다고 합니다.

 

 

 

개울을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물레방아간을 세워두어 발걸음을 잡고 있는데..

 

 

 

이곳 장생이 마을의 장승은,

옛 문헌인 "여지도서(與地圖書)"에 기록이 나와 있으며,

금계동과 순흥면 태장리를 잇는 관로에서 노표(路標)의 역활을 했다는 기록에 남을만큼 유서깊고,

마을 이름또한 "장생이 마을"로 불리울 정도 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소멸되었는데,

  마을주민들의 장승에 대한 애착과 영정이 더해져 영주의 특산물인 인삼과 사과를 홍보하는 문구로하여 다시 세웠습니다.

 

 

맨뒤의 장승은 특이 하게도 나무를 뿌리채 거꾸로 세워,

이곳이 10승지임을 표현하는 "도선국사"의 풀이한 문구를 새겼는데,

"동국명승 대세지보 일왈금계 운길천년(東國名勝 待世之寶 一曰金鷄 運吉千年)"으로,

"동국의 명승이요, 세상이 기다리는 보배로다, 첫번째가 금계이니, 좋은 운이 천년을 이어지리라" 라는 뜻 입니다.

 

 

 

고목에도 꽃이 핀다고 했는지..

장승의 아랫부분에는 이름모를 버섯이 보여집니다.

 

 

 

장생이 마을의 금선정(錦仙亭) 입니다. 

풍기에서 북쪽으로 약 5리. 속칭 장생이 마을뒤 계곡에 자리해 있습니다.

 

 

 

반기듯 활짝 열려있는 일각문이 보이고  금선정(錦仙亭)의 일부가 들어 옵니다.

 

 

 


금선정은 풍기가 낳은 석학 금계(錦溪) 황준랑(黃俊浪: 1517~1563)이 즐겨 찾아 유상하던 곳으로, 

금선대 위의 아담한 정자는 정조(正祖)5년에 금계 선생의 후예가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하여 세워 금선정(錦仙亭)이라 명명 하였습니다.

 

 

 

금선정(錦仙亭)의 현판(懸板)으로,

군수 이대영(李大永)이 1785년(정조 9)에 당시 목사였던  조윤형(曹允亨)의 글씨를 받아 걸었다고 합니다.

 

 

 

금선정에 올라 봅니다.

 

 

 

소백산 비로봉, 연화봉에서 근원하여 정안동 계곡의 욱금동천을 누벼내린 옥계청류(玉溪淸流)는 이곳에 이르러

한바탕 화사로운 수석(水石)의 잔치를 펼칩니다.

정자 위에는 드높은 푸른 절벽이 있고 절벽 앞에는 나즈막한 폭포가 있어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는 세상시름을 잊히게 할듯 우렁차며,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벽을 두른 맑은 소(沼)가 있어 수면(水面)에 반영되는 정자는 한폭의 그림으로 빼어난 경치의 명승(名勝)이자, 경승(景勝)입니다.

 

 

 

풍기의 금선정(錦仙亭)은 소백산 자락에 건립된 정자로서,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시원한 빠른 물살이 흘러 내려,

한 여름에도 물이 차가워 발을 오래도록 담그지 못할정도로 물이 차다고 하는곳으로

1781년(정조 5년) 풍기군수 이한일(李漢一)이 금선계곡의 금선대(錦仙臺)에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錦仙亭)이라 이름하였는데,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찿아 인근 유상풍류객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자연 암반에 의지해 걸터앉듯 자리한 정자의 모습이며,

 

 

 

금계 황준량(黃俊良)이 바위를 금선대(錦仙臺)라고 명명하고 학문을 강구하고 음풍농월지로 택하였으며,

1757년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정자아래 바윗벽에 “금선대(錦仙臺) 三글자를 커다랗게 새겨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정자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바위에는 깊게 패여진 홈이 보여 눈길을 잡고..

 

 

 

금계(錦溪) 황준랑(黃俊浪)은 1517년 중종12년에 태어나서 1563년 명종18년에 졸하였는데,

퇴계 이황의 문하로 18세에 국자감시에 응시하여 책문으로 명성을 알렸으며 35세인 1551년(명종6) 경상도 감군어사로  순행하다가  이간 당하여,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된 것을 물론(物論)으로 연류 되어 체직되어 신령현감으로 부임하여 백학서원을 세웠으며 41세인 1557년(명종12)년에 단양군수,

44세인 1560년(명종15)성주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성격이 담백 하므로 모계(謀計)를 모르는 성격이고,

비굴한것 에 대한 처신을 원칙으로 일관하는 선비였다고 합니다.

 

 

 

천석(泉石)이 하도 아름다워,

금계(錦溪) 황준랑(黃俊浪)이 반해 즐겨 거닐던 곳으로,

정자는 물가에 드리운 절벽위에 자리해 있으며,

정자 아래는 널찍한 반석이 대(臺)를 이루어 금계(錦溪)가 금선대라 이름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주세붕(1495∼1554)이 풍기군수를 하던때 금계는 후진였으나,

"죽계지", "경기체가" 의 논쟁으로 서로의 견해를 명백하게 했던 사이기도 하였는데,

풍기 군수 직에서 성균관 사성으로 체직되는 주세봉을 보내면서 읊은 이별의 시가 있습니다

送周城主景遊赴召還京(송주성주경유부소환경)   *경유(景遊):주세봉의 아호
 
日下路千里  (일하로천리)         태양아래 세상길은 천갈래지만              
斗南公一人  (두남공일인)         자주홍포 드리운 공 은 한사람이네

丹忠縣白日  (단층현백일)         고울에 붉은 충심은 밝다 못해 희고         霜贊入紅塵  (상찬입홍진)         서리를 위하여 붉음 하나가 입조하네.

惠化終難훤  (혜화종난훤)         은혜가 이별되어 잊기가 어려우나           心期久益眞  (심기구윽진)         마음으로 오랜세월 참이 더할뿐이네

乾坤陽己動  (건곤양기동)         천지 간에 밝은 기운 이미 움직이니         聊贈一枝春  (료증일지춘)         힘있는 한 줄기 봄을 보내네.

금계(錦溪)의 31세때 것으로 호연지기 와 풍류의 기개가 서려있고 담백한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금계(錦溪) 황준랑(黃俊浪)의 심진대(尋眞臺) (외집1권)으로 스님의 문구에 화답한 시 입니다.

窓外冷風透衿寒   (창외냉풍투금한)   창밖에는 냉풍이 차갑게 불어 옷소매에 들어오고

抽身逈出碧雲端   (추신동출벽운단)   사무친 몸을 이끌어 내어 푸른구름앞에 서네

粧林紅염春留景   (장림홍염춘유경)    탐스럽고 붉게 단장된 봄이 경관으로 머물고

削鐵蒼崖錦點班   (삭철창애금점반)    쇠를 깍은듯한 낭떠러지는 금비단으로 얼룩지네

滿目雲山眞快活   (만목운산진쾌활)    구름산이 눈에가득차고 쾌할하게 살아있으니

千盤世路自蹣跚   (천반세로자만산)    하늘위에 놓인 세상길 절로 넘어지고 절뚝이네

仙翁釋子休相訝   (선옹석자휴상아)    신선 옹 이여! 스님이여, 맞이한 나 를 의심하지말게나

已決梵魚老翠巒   (이결범어노취만)    어대 를 물리고 산봉우리에서 늙기로 이미 결정하였네.

 

 

 

도선국사와 정감록의 십승지중 으뜸 승지인 금계리 장생이 마을의,

금선계곡의 금선대위에 날아갈듯 자리하였지만 화려하지 않고 소담한 정자로,

자연의 풍광을 한껏 누리는 영주의 아름다운 정자 "금선정(錦仙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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