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을 다녀오면서 홍범식 고택을 찾았습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괴산 홍범식 고가(槐山 洪範植 古家)는,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생가 이기도 합니다.

 

 

 

대문채의 모습으로,

조선 중기 중부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홍범식 고택'은,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에 강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국열사 홍범식 전 금산군수(1871~1910)가 태어난 곳으로,

문화재청에 등록된 명칭은 '괴산동부리고가'로 되어 있고 고택앞 안내판에는 '일완 홍범식고택'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홍범식 고가(洪範植 古家)는 조선후기 중부지역의 대가로 규모가 큰편여서,

고택의 배치도를 살펴보고 들어갑니다.

 

 

 

대문앞에는 대문채 앞에는 굴뚝으로 보여지는 것이 보이는데 굴뚝이 대문앞으로 나와있는 특이한 모습입니다.

 

 

 

괴산 홍범식 고가(槐山 洪範植 古家)로, 홍범식의 가계를 살펴보면..

조부 홍우길은 이조판서로서 서화에도 뛰어나 ‘휘경원지’등의 작품을 남긴 인물이며,


부친인 홍승목(洪承穆, 1847 ~1925)의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한양출신으로,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입니다.

한성부 출신으로 1875년 과거에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홍문관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879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자리에 올랐으며, 1881년과 1883년에는 각각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1890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습니다.

홍승목은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된 후부터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여,

1910년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직전부터 협조한 관료들에 비해서는 좀 더 이른 시기에 적극적으로 친일파로 전향한 인물로,

대동학회 회장직과 대동학회 후신인 공자교회의 부회장도 역임했고 1908년에는 민원식이 주도한 친일단체 제국실업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관진방회에 가담했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의 찬의가 되어 1921년까지 재직했으며,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도 서훈 받았습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왼쪽으로 아랫 사랑채가 먼저 보이고 뒤에있는 중문을 통하면 사랑채가 있습니다.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의 이곳에서 출생하였으며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입니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여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랑채뒤의 소나무애 목매어 자결 하였습니다. 

그는 유서 5통을 남겼는데 일본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홍범식(洪範植 ) 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아랫 사랑채의 모습으로, 

홍범식 고택은 역사소설『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생가로 최근 복원을 마쳤는데,

홍범식 고택은 월북인사의 집이라 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아 오랜기간 방치 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는데, 

소설 임꺽정이 정식 출간된 후에야 복원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벽초 홍명희가 10년에 걸쳐 집필한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서 민족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 입니다.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洪命熹, 1888~1968년)의 본관은 풍산.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며,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로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총리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9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습니다.

홍명희는 일제 강점기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 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우리에게 잘알려진 인물입니다.


또한 홍승목의 며느리였던 조씨(? ~ 1950)는  한국 전쟁 중 월북자의 가족이라 해서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을 앞에둔 사랑채가 자리해 있으며,

이곳의 가옥은 1730년(옹정 8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고가인 동시에,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며,  문학사적 유산이자 항일지사의 고택인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채는 안채의 왼쪽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랑채의 모습으로  이 집에서는 금산군수로 재직하다 1910년 한일합방에 항거·자결한,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이 성장한 곳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지역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꾀하기도 하였다고 전하는 곳입니다.

 

 

 

사랑채는 1919년 3월19일 괴산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고 전하는 3.1만세운동 유적지이며

또한 근대역사소설의 이정표가 된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고택으로도 널리 알려진 문학사적 유산입니다.

10년에 걸쳐 집필한 '林巨正(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서 민족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홍명희 증조부 "홍우길"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조부인 "홍승목"은 친일파로, 부친 "홍범식"은 순국열사로 기록 되었으며, 

"홍명희"는 독립운동가에서 월북후 북한 부수상을 지내게 되어 풍산 홍씨 4대의 굴곡된 가족사를 엿보게 합니다.

격동의 시대가 그들의 삶을 극과 극으로 치닫게 하였지만  삶의 몫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부분으로 보입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갈수있는 작은 외문이며..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이자 괴산만세운동과 좌우합작전선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지만,

해방 후 북한 내각의 부수상을 지낸 전력 때문에 고향에서는 한동안 그의 이름 석자는 언급도 할 수 없어서,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홍명희 생가'란 명칭은 보훈단체로부터 철저히 배격된 반면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와 한국작가회의 등 진보 성향 문학계를 중심으로는 '홍명희 생가'란 명칭을 더 보편적으로 부르고 있는 현실 입니다.

 

 

 

사랑채에서 되돌아 나와 안채로 향합니다. 

안채는 대문채에서 직선으로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비켜선 광채와 이어진 중문을 들어설수 있습니다.

 

 

 

문을 들어서면 안채는 바로 보이지않고 잠시 비켜서야 볼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아녀자를 위한 배치로 보여집니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의 모습으로 구조는 전체적으로 정면 5칸·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一’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하여,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으로 폐쇠된 구조을 보여줍니다.

 

 

 


홍범식 고택은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의 살림집의 특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너른 고택에서의 전통혼례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양쪽에 방을두고 중앙에 정면3칸의 너른 대청을 두었으며,

 

 

 

안채의 오른쪽에 있는 부엌의 모습도 들여다 봅니다.

 

 

 

안채의 뒤편에 있는  "ㄱ"자 구조의 창고인 광채 입니다.

 

애초 1984년에는 당시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괴산 이복기 가옥'(중요민속자료 146호)이란 문화재명이 붙여진 이 고가는,

원형 훼손과 재산권 행사 등의 이유로 1990년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기도 하였는데,

또한 이전에는 흔히 '인산리 고가'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이후 이 고가의 이름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는데,

문화재 지정이 해제된 1990년대 중반 이 고가 앞에는 주민들이'소설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 생가'란 간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보훈단체의 반발로 이 간판은 철거되고 앞 뒤에 '의사 홍범식 생가'와 '소설 임꺽정 작가 생가'란 이름의 간판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택의 이름에 '홍명희'란 이름이 빠진 것입니다.

그 뒤에는 '동부리 고가'란 간판이 세워졌고 2002년 소유권이 괴산군으로 이전되고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이 고가는 '홍범식 고택'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부친으로서,

경술국치(庚戌國恥)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금산군수(錦山郡守) 홍범식(洪範植)은 1910년 8월 29일 국권상실의 소식을 들은 후,

"죽을지언정 친일은 하지말고 먼 훗날이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마라" 라는 유서를 아들에게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근대역사소설의 이정표가 된 '林巨正(임꺽정)'의 작가 碧初(벽초) 홍명희(洪命熹)의 고택으로도 널리 알려진 문학사적 유산으로,

10년에 걸쳐 집필한 '林巨正(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서 민족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 추진해온 홍명희의 생가 복원사업은 그동안 홍명희가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보수단체들의 거센 반대 여론과,

그가 우리나라 4대 소설가 중 한 사람이라는 문학가와 역사가들의 긍정적인 주장으로 인해 늘 논란이 되어왔는데, 

그로인해 홍명희의 아버지인 '홍범식 고택'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곡식을 저장하는 뒤주와 김치광의 모습도 보입니다. 

고택을 둘러보면서 유난히 부엌과 광채가 크고 많은것을 볼수있었는데,  

이마도 선대로 부터 대를 이어오는 벼슬로 사대부 집안의 부를 누렸던 집안으로 보입니다.

 

 

 

곡물을 저장해두는 뒤주의 모습으로,

앞면을 막아두는 판재에 수량을 가늠하는 숫자가 씌여있어 눈길을 잡아둡니다.

 

 

 

아랫 사랑채를 기점으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등이 있는 안채의 뒷마당을 돌아 나오니 대문채의 안마당으로 되돌아 나오게 됩니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 곁에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괴산 출신의 순국열사 홍범식(1871~1910) 전(前) 금산군수의 추모비가 서있습니다. 

"의사 홍공범식 추모비는(義士 洪公範植 追慕碑)"는 괴산 향토민속자료 전시관 앞쪽에 세웠다가,

선생의 추모비가 생가에 위치하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보고 선생 서거 100주기를 맞은 해에 홍범식 고택 옆으로 추모비를 이전하였다 합니다.


역사의 흐름속에서 극명하게 다른 굴곡진 삶을 살았던 풍산 홍씨의 가족사로,

가슴 먹먹한 근대사를 되돌아 보게하는 "괴산 홍범식 고가(槐山 洪範植 古家)" 방문기로,

이곳은 365일 언제나 관광객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고 하니 과산을 여행 하시면 다녀 옴직한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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