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를 여행하면서,

영주의 소중한 문화유산, 제민루와 함께있는 삼판서 고택을 찾았습니다.

 

제민루(濟民樓)는 영주를 가로지르는  영주시 가흥1동 서천(西川)가의 언덕 위에 자리해 있습니다.

 

 

 

제민루(濟民樓)는  본래 구성산 남쪽 기슭에 있었는데,

1433년(세종 15)에 군수 반저(潘渚)가 창건하였으며 1467년(세종 13)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보수하였고

1588년(선조 21)에 향인(鄕人)의 합력(合力)으로 개축하니 향서당(鄕序堂)과 상접(相接)하였습니다.

1598년(선조 31)에 군수 이윤상(李允商)이 의국(醫局) 3칸을 설치하고 약제(藥劑)를 취급하다가,

다시 의약소(醫藥所)로 개칭(改稱)하고 제약구민(劑藥救民)하다가 폐지(廢止)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군수 이대진(李大震)이 또 루의 북쪽에 의국을 재건(再建)하고 의료업무를 실시하여 제민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제민루의 현판으로,

제민루(濟民樓)는 우리나라가 양반 자제들에게 처음으로 의술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의약소(醫藥所·지금의 보건소)로,

퇴계 이황이 이곳에서 6개월을 머물기도 한 제약구민(劑藥救民)을 하던 곳입니다.

 

 

 

2층 누각으로 올라보려 하였으나 닫혀 있습니다.

 

 

 

제민루는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자생한 진귀한 약재를 저장하고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던 곳이지만,

선비들이 모여서 시가를 읊기도 하는 경로소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제민루는 창건후 오랜 풍상(風霜)을 겪어 여러차례 보수(補修)를 하였으나,

노후(老朽)로 퇴락이 심하던 중 1961년의 홍수(洪水)로 붕괴(崩壞)되고 말았고,

1965년에 현재의 위치에 이건 하였습니다.

 

 

 

 

제민루가 있는 언덕 바로 아래에 "삼판서 고택"이 자리해있어 찾아 봅니다.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으로,

원래 이고택은 구성공원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961년 영주의 큰 홍수를 원인으로 집이 기울어져 철거 되었다가, 

2008년에 구학공원의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자리잡아 다시 세웠습니다.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은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세명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의 첫 주인은 고려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1305~1366)으로,

 정운경은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1343~ )에게, 황유정은 다시 사위인 영유현령 김소량(1384~1449)에게 이 고택을 물려주었는데,

김소량의 아들 김담(1416~1464)이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어 이후로는 김판서의 후손들이 이 고택에서 대를 이어가며 살았습니다.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에서는 위의 3판서 뿐만 아니라 조선개국 일등공신 정도전, 사헌부 지평 황전, 집현전학사 김증 등,

수 많은 학자와 명신들을 배출한 곳일 뿐만 아니라 경향각지의 많은 선비들과 교류한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삼판서 고택 고택은 영주가 낳은 대표 선비이며,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유년기를 보낸 곳으로,

삼판서 고택은 얼마전 큰 인기를 누렸던 대하드라마 "정도전"을 통해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잧아주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고택을 들어서면 고택의 바로 뒤쪽에 우뚝 서있는 제민루가 들어오고..

 

 

 

 


솟을 삼문을 들어서 한단을 올라선 자리에 사랑채와 마주하게 됩니다.

 

 

 

사랑채에서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의 외삼문을  봅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 ~ 1398)의본관은 봉화로,

자는 종지 호는 삼봉, 시호는 문헌으로 충주사록으로 출사하여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성균박사, 예의정랑, 성균관대사성,

조선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편호조사 겸판상서사사, 보문각대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판의홍삼군부사 경상 전라 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습니다.

저서로 조선경국전 고려국사 경제문감 삼봉집등이 있으며. 조선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창안하여 기틀을 잡았습니다다.

 

 

 

삼봉(三峰)은 몇차례의 유배에서 풀려나서는,

이곳 삼판서고택에서 심신을 달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랑채의 마루 위에는 "집경루"의 현판이 보이고,

 

 

 

사랑채의 한쪽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섭니다.

 

 

 

안채로 들어서면 영남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가구형태인 "ㅁ"자 형으로,

 

 

 


사랑채의 뒤에 사방이 막힌듯한 안채의 구조는 곳간과 방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높이를 달리하여 지어진 지붕의 모습이며..

 

 

 

세명의 판서(判書)가 연이어 살았다하여 붙여진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700년 가까이 견디어 오다가 1961년 영주 대홍수로 일부 붕괴 되었으며 그 후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었습니다.

1999년 지역 유림(儒林)에서 삼판서고택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복원사업을 펼친 결과,  

2007년에 16억원의 예산을 확보, 현 위치인 구학공원에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에 "ㅁ"자형 한옥으로 2008년 10월에 준공했다고 합니다.

 

 

대가의 안채답게 너른 대청 마루의 왼쪽 모습이며,

 

 

 

부엌이 있는 오른쪽의 모습으로 안채에도 여러개의 편액을 볼수가 있습니다.

 

 

 

안채 마루에서 오른쪽에 자리해있는 부엌의 모습입니다.

 

 

 

조선 건국의 기틀을 잡아 가장 큰 기둥으로 가장 큰일을 해내었지만,

태종 이방원의 재물로 자신이 죽인 정몽주에 비해 폄하되고 이율배반적인 기록으로 남겨지게 하여,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었던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과,

제약구민(劑藥救民)으로 병든이를 돌보았던 영주의 제민루(濟`民樓) 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