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듯 해가 바뀌어,

2017년을 시작하는 첫 여행지로 안동의 북부지역을 택하였고,

그중 가장 먼저 찾은 곳으로 안동의 빼어난 정자 고산정(孤山亭) 입니다.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의 고산정(孤山亭)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로,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斷崖)아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으로 들어가려면,

상류지역여서 그리 넓지않은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편에 마주하며 서서 정자의 반영과 정취를 느껴 봅니다.

 

 

 

고산정(孤山亭)의 주위에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정자의 앞으로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에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있다고 합니다.

 

 

 

고산정(孤山亭) 입니다.

길안의 만휴정과 더불어 선비의 고장 안동을 대표하는 정자로,

우리나라 10대 정자 중에 들어갈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있습니다.

 

 

 

청량산 자락에서 툭 튕겨진 이 바위산은 고산이며,

고산 아래 청량산을 휘감아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는 곳은 징담이라 합니다.

 

 

 

고산정(孤山亭)의 주인 금난수(琴蘭秀)는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로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고

35세에 당시 선성현(宣城縣, 당시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었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 하였다고 합니다.

 

 

 

고산정(孤山亭)의 현판이며,

 

 

 

고산정(孤山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경사면에 3m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후,

얕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가운데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는데,

우측 방은 통간으로 하였으나 좌측 방은 뒤쪽의 1칸만을 온돌방을 들여  마루가 "ㄱ"자형으로 깔리게된특이한 구조입니다.

 

 

 

정자의 전면과 양쪽의 측면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으며,

출입은 난간의 양측 끝에서만 하게 하였는데 출입을 위한 디딤돌이 앙증맞습니다.

 

 

 

고산정(孤山亭) 내부의 모습으로,

퇴계(退溪)는 특히 금난수(琴蘭秀)를 아껴 이곳에 자주 왕래하며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고산에 노닐며", "고산에서 금문원을 보고" 등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외딴곳에 있어서 도난을 우려해서 인지 내부의 편액은 탁본을 걸어두었는데,

고산정(孤山亭) 창건 당시부터 경상북도 예안 지역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알려져,

그의 스승인 퇴계(退溪)도 수차례 문인들과 함께 와서  「서고산벽(書孤山壁)」·「유고산(遊孤山)」·「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등으로, 

영시유상(詠詩遊賞)하였다 전하며 "고산제영(孤山題詠)"에는 퇴계문도를 비롯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들까지 찾아 차운(次韻)한 시(詩)가 수백 수에 달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산정에 보존된 퇴계(退溪)의 한시 「서고산벽」을 살펴 봅니다.

日洞主人琴氏子   隔水呼問今在否   耕夫揮手語不聞   愴望雲山獨坐久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고산정(孤山亭) 내부의 한칸 크기의 아담한 온돌방 모습으로,

 

 

 

천정의 모습에서 자연 친화적인 느낌이 묻어 나옵니다.

 

 

 

벽면 윗쪽에 자그마한 창에도 눈길이 갑니다.

 

 

 

팔적 지붕의 매력이기도한 우물반자의 천정도 눈에 들어고..

 

 

 

마루에서 보이는 상량 옆으로는 제법큰 틈이 보여서 들여다 보니,

 

 


 

마루방의 천정 위에는 말벌이 벌집을짓고 기거를 하고 있습니다.

여름철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피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고산정(孤山亭)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테백 황지에서 발원해 안동댐을 향해 내려가는 모습이며..

 

 

 

문명산과 청량산을 감아 돌며 고산정 앞으로 들어오는 낙동강 상류의 모습입니다.

 

 

 

고산정(孤山亭)은 남향으로 자리잡고있어서인지 마루에서의 앞모습은 마주하는 햇빛으로 담기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이며, 

예전에는 이곳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수 없어 아쉬움은 있으나,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우러져 조선시대 정자의 멋스러움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의 주인 금난수(琴蘭秀:1530(중종 25)~1604(선조 37)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 테어났으며,

처음 김진(金進)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습니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1577년(선조 10)제릉(齊陵)의 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集慶殿)과 경릉(敬陵)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에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가 되었습니다.

그 뒤 직장(直長)·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고 합니다.

그 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왔습니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성재집』이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은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한,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건물도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청량산(淸凉山)아래의 가송협의 절벽곁에 고산정(孤山亭)이 자리 하고있어,

빼어난 절경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자에서 나와 오른쪽에 있는 가송협의 절벽쪽으로 향해봅니다.

 

 

 

짧은 오솔길이 끝나는곳에 가송협 절벽의 끝부분과 만나게 됩니다.

 

 

높이 올리지 않아 더욱 안정감이 있어보이는 고산정(孤山亭)으로,

 

정자 아래의 높은 축대 덕분에 빼어난 주변 풍광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고산정은 정자에서의 풍광은 이곳은 떠나면서도 뒤돌아 보고 싶은 묘한 매력을 남길 정도로 뛰어나지만,

강건너에서 바라보는 정자의 모습은 가슴 설레게 할만큼이나 빼어 납니다. 

가송협의 단애(斷崖)아래 한마리의 고고한 학(鶴)으로 내려 앉은듯한 안동의 아름다운 정자 고산정(孤山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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