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를 다녀 오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를 다녀왔습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인천기념물 제 30호인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로,

전등사에서 동막 해수욕장 가는길의 우측에 자리해 있습니다.

 

 

 

생가(生家)로 들어가는 이면 도로에는 길따라 심어둔 엄나무가 가로수를 대신하듯 서있고,

 

 

 

생가(生家) 앞에는 이건창의 한시 "송양가는 길에"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로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韓屋)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당에서 보이는 대문채의 모습으로 대문을 중간에 두고 작은방과 곳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루 안쪽에는 명미당(明美堂) 현판이 보이며,

명미당(明美堂) 이란 "밝고 아름다운 집" 이란 의미라 하며 초가 이지만 당호에 걸맞는 소박함을 보여 줍니다.

 

 

 

이건창(1852∼1898)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로 강직한 성품을 지녀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하며,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고종 11년(1874) 서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충청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습니다.

 

강직한 성격 탓에 세 번씩이나 유배되고 또 풀려났었는데 특히 부정한 관리를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존경 받았으며,

양명학의 지행합일을 내세운 강화학파의 마지막 대학자 였습니다.

 

저서『당의통략』은 파당을 초월하고 친족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평가 받고 있으며,

 

『당의통략』외에 『명미당집』을 남겼습니다.

 

 

 

 

 

소박했던 살림살이 였슴을 보여 주려는듯,

마루 위에는 그리 크지않은 뒤주의 모습도 보입니다.

 

 

 

방문앞의 자물쇠와 꽃문양의 장식도 보이고..

 

 

 

방의 모습으로 겨울의 북풍을 고려해 뒤쪽의 창은 작게,

남쪽의 전면은 크게 해두어 채광과 바람맞이를 고려 했슴이 보입니다.

 

 

 

건물의 굽어진 부분에 위치한 안방옆에 자리한 부엌도 들여다 봅니다.

 

 

 

초가 처마의 모습으로 빗물을 고려한듯,

제비 꼬리처럼 내어진 부분이 앙증맞게 보입니다.

 

 

 

대문을 들어서 마당의 왼쪽에는 우물의 모습이 보이고,

 

 

 

모양만 갖추어둔 우물로 보였는데,

무거운 두껑을 열어보니 의외로 깊고 깨끗한 우물의 물을 볼수가 있습니다.

 

 

 

생가 뒤편의 모습으로,

화재와 연기의 그을림을 고려해서 인지 멀찌감치 물러서 있는 굴뚝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생가의 뒤쪽 옆에는 1866년 10월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에 강화가 함락되던 날

자결한 이건창의 조부(祖父) 충정공(忠貞公)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시원(李是遠,1790~1866)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15년(순조 15)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한성부우윤, 개성부유수, 승정원좌승지, 대사헌, 좌참찬,

예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정헌대부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백성을 살피고,

세금포탈 등을 엄히 다스렸던 강직한 인물로,

1866년 가을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 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시문 10권과 고금서초(古今書鈔) 100여권, 『야사초(野史鈔)』 몇 권이 후손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며,  

편서(編書)로는 『정주도회과작(定州都會科作)』 1책이 있습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입니다.

 

 

 

오래된듯한 묘비가 보이는,

이건창의 7대 조부인  삼취헌(三翠軒) 이대성(李大成,1651~1718)의 묘가,

이건창의 생가 옆 이시원(李是遠)의 묘소 윗쪽에 있습니다.

 

 

 

이건창 생가를 나와 길 건너에 있는 사기리 탱자나무를 찾아갑니다.

 

 

 

1962년에 천연기념물 제 79호로 지정된 탱자나무로,

4월이면 잎보다 지름 3~5cm의 흰꽃이 먼저 피고 열매를 맺는 가을이면 노랗게 탱자열매가 익습니다.

이 탱자나무는 갑곶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8호)와 함께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4m, 밑둘레 1m, 수령은 약 400년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찬바람을 막아주지 못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몇 차례 외과수술을 하였다고 하며, 

썩은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쇠약해진 곳을 보강하였으나,

수관(樹冠: 나무의 줄기 위에 있어 많은 가지가 달려 있는 부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서 서쪽 가지는 완전히 죽어 버렸고,

동쪽가지는 지주로써 지탱하고 있으며  뿌리 근처에서 돋아난 맹아(萌芽: 식물의 새로 트는 싹)가 자라기 시작하여 다시 자라고 있습니다.

 

 

 

땅 위 2.8m 높이에서 세갈래로 갈라져 용트림 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공을 피하여  천도한  곳으로,

조선시대 인조도 병자호란(1627) 때 가족과 함께 난을 피한 장소 입니다.

이를 계기로 성을 튼튼히 하고자 성밖에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심어서 적병이 쉽사리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하며,

나라에서는 탱자나무를 심을 종자를 보내주고 그 생육상태를 보고받아서 이 나무의 이용지역을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의 탱자나무도 그 때의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증되며,

탱자나무는 경기도 이남에서 자라는 낙엽관목으로 해양기후의 덕분으로 따뜻한편인 강화도가 생육의 북쪽 한계선이라고 합니다.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고 하며,

우리나라와 일본의 탱자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여 어릴적 과수원 담장으로 많이 보아온 추억의 울타리 나무 입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 에는,

수많은 유적지와 볼거리가 풍부한 곳여서 자칫 소외 될수있는 문화재와 기념물로,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 "이건창(李建昌) 생가(生家)"와

400여년을 뿌리내려 살아오며 강화의 역사를 바라보며 서있는 "사기리 탱자나무"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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