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를 다녀오면서,

시간을 내어 "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를 찾았습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 생가(海公 申翼熙 生家)로,

 

 

 

아담한 솟을 외문을 들어서면 저만치에 사랑채가 보이고..


 

 

솟을외문 곁에는 제법 나이들어 보이는 향나무 두그루가 서있습니다.

 

 

 

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는 원래는 지금보다 동남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22년에 장마에 파손된 것을 옮겨 다시 지은 집으로 6·25 전쟁으로 사랑채가 폭격을 받아 파손된 것을 근래에 개축하였고,

1994년에는 안채를 보수 하였습니다.

 

 

 

사랑채의 작은 마루위에는 만앙정(萬仰亭)의 현판이 보이고,

 

 

 

사랑채의 문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갑니다.

 

 

 

사랑채는 사랑방 2칸에 대청이 1칸 있으며 꺽이면서 방 1칸이 있으며,

대문 우측으로도 방 1칸이 있는데 안마당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채의 꺽여진곳 옆에는 몇개의 돌이 보이는데 어떤 용도로 사용 했었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안채의 모습으로,

안채는 좌측 끝간이 건너방으로 2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이 있으며 

꺽이면서 부엌이 있는데 지금은 안방 뒤로 다시 방 2칸과 욕실을 부설하여 변화가 생겼습니다.

 

 

 

안채의 방은 삼량, 대청은 오란집이며 기둥은 6치(185㎝가량)정도의 크기이며,

높이는 8척(영조척:營造尺)가량이며 간살이도 영조척으로 7·6척 가량으로  반듯하며 소담하게 생겼고 격조가 있는집 입니다.

 

 

 

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는 "ㄴ"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가 울타리 안에 있어,

이러한 배치 유형은 충청남도 북부와 경기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데,

사랑채가 대문간과 함께 시설하는 것이 보통이며 사랑방은 외부를 향해 개방해서 바깥에서 출입하기에 용이하게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865년(고종 2년)의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옮긴 건물은,

전체적으로 20세기초에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2002년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된 뒤 1년여 만에 복원 되었습니다.

 

 

 

안체의 부엌 뒤쪽에는 장독대의 모습과,

 

 

 

생활의 필수인 우물의 모습도 보입니다.

 

 

 

안채의 뒤쪽에는 담장 사이에 작은 일각문이 보이고..

 

 

 

일각문을 들어서면 비석군들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후원은 선생의 글귀를 새긴 돌비석 공원을 조성해 두었는데,

신익희 생전의 필적들을 돌에 새긴 돌비석공원으로 추모의 글귀를 모은 8각 돌비석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의 동상으로,

신익희는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 1913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후,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강의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비서장·법무총장·외무총장·문교부장 등을 역임 했습니다.

내무부장 재임 때 8·15 해방을 맞아 귀국 하였으며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냈고,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으로 피선되었으며,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당 위원장에 취임 했습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 되었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 되었고 이어 제3대 민의원에도 당선 되었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키면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습니다.

자유당의 이승만에 맞서 1956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 하였지만,  

출마 3일만인 5월 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하러 가던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사망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185만여 표의 추모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韋)을 추서 받았습니다.






후원의 비석들은 모두 근자에 세운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의 큰기둥으로 독립운동가 이자 정치가 였던,

경기도 광주의 문화재 "해공 신익희 생가(海公 申翼熙 生家)"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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