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를 다녀오면서, 

남면 휴암로(매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양주 백수현가옥(楊州 白壽鉉家屋)"을 찾았습니다.

 

경기도 중요 민속자료 제128호로 지정 되어있는 양주 백수현가옥(楊州 白壽鉉家屋)으로,

구한말 비운의 왕비였던 명성황후의 피난처로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조선 말 정국이 혼란해지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피난할 집으로 서울의 고옥(古屋)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명성황후의 경호원 김종원은 명성황후로부터,

동대문 밖에 은신처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고 장소를 물색하며 북상하던 중,

현재의 양주시 남면 매곡리에 이르러 지형의 안온함을 보고 가옥을 짓게 되었다고 전하며,

또는 "양주 백수현 가옥"은 장희빈(張禧嬪)[?~1701]이 살았던 집이라고도 전해지는데,

건립 당시 105칸의 규모였다고 하며 지금은 안채의 일곽만 남아 있습니다.

 

 

 

양주 백수현 가옥을 보면 기둥 목재를 잇대어 지은 부분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는 건축물의 높이가 낮아 기둥 길이 또한 짧아 이를 높인 것이라고 볼 수 있어서,

양주 백수현 가옥(白壽鉉 家屋)은 고려와 조선의 건축 기법이 접목되어 있는 건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방한을 위한 이중벽이 설치되어 있는 것과 더불어,

여러 곳에서 궁궐 건축의 특징이 나타나는 점도 주목받고 있는데 지금은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양주 백수현가옥(楊州 白壽鉉家屋)의 구조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口" 자형의 집이었으나 현재 사랑채와 별당채는 지대석만 남긴 채 헐리고 없으며,

지금은 튼 "口" 자 모양인 살림채만 남아 있는데,

외부 공간은 행랑채 앞의 사랑 마당, 집 안의 앞마당, 안채 뒤의 뒤뜰로 이루어 졌으며,

살림채는 "ㄴ" 자형의 행랑채와 꼬리가 달린 "ㄱ" 자형의 안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일반적인 "ㄱ" 자형 집과 같아서 부엌·안방을 세로로 두고 꺾어져서,

대청-건넌방의 순으로 배치하였고 부엌 뒤에 가로로 광과 뒷방을 곁달고 있슴을 볼수 있는데,

이러한 평면 구성은 사대부 집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보칸은 모두 한 칸 반으로 하였는데..  

다만 뒷방 쪽만 단칸 크기로 만들었고 도리간은 부엌·안방·대청이 2칸 길이이고, 기타는 단칸의 구조 입니다.

 

 

 

양주 백수현 가옥에서 태어나고 자란 백수현(白壽鉉)에 의하면,

철원 궁예 성터에서 고옥(古屋)을 헐어 와 지은 집으로 조선 시대와 관련된 부연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며,

명성황후가 이곳을 실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석재의 크기나 가공 수법, 목재의 크기나 치목 수법 등이 궁궐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양주 백수현가옥(楊州 白壽鉉家屋)이 명성황후의 피난처로 지어졌다는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마루에서 들어올려진 문위로,

길고 촘촘한 창의 모습에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엿볼수 있으며..

 

 

 

마루 위에는 선반을 올려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인 모습입니다.

 

 

 

처마 아래에는 제비가 집을 지었었는지 새집의 흔적이 보이기도 합니다.

 

 

 

마루 아래를 살펴 보면,

 

 

 

마루를 받치는 작은기둥 하나하나에도 돌을 다듬어 세워 기둥을 받혀둔 모습이 보입니다.

 

 

 

안채의 뒷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작은 창고가 있고.

 

 

 

비록 녹슬긴 했지만 곳간의 잠금 장석에서 백수현 가옥의 품위를 찾아볼수 있습니다.

 

 

 

창고 안에는 옛사람들의 생활 도구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백수현 가옥(白壽鉉 家屋)에는 원래 사랑채와 별당채가 더 있었다고 하며,

안채·행랑채 밖에 사랑채의 터전이 남아 있는데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 있다면 이 집은 명품으로 손꼽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뒤편으로 들어내어 우뚝하게 솟아올린 굴뚝에서도,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처마위까지 쌓아올린 모습이며,

 

 

 

굴뚝의 상부에도 장식을하여 주택의 품위를 말해 주는듯 합니다.

 

 

 

겨울의 북풍을 막기위해,

2중으로 문을 내어둔 모습으로 조선후기의 고택에서 볼수있는 모습 입니다.

 

 

 

집 뒤에 있는 매봉재가 병풍처럼 좌우로 감싸 안고 있으며,

집 앞에는 너른 들이 펼쳐지고 동네 어귀에는 조그만 냇물이 흘러 풍수상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안채 서편에는 우물이 자리해 있고, 

서북편 언덕 위에는 장독대와 앵두나무 등의 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서 소박한 대로 원야(園冶)하였던 흔적도 보이고 있습니다.

 

 

 

안채만 남아있어 아쉬움이 있지만,

격조 높은  사대부의 제택(第宅)을 살펴 볼수 있었던,

양주의 백수현 가옥(白壽鉉 家屋)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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