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의 문화재를 찾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의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를 찾았습니다.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는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언론인 안재홍이 태어나 살던 집으로,

 

 

 

생가가 있는 고덕면 두릉리는 택지 개발이 시작 되었는지,

마을 군데군데에서 철거가 시작된 모습이 보이고 길도 끊어진곳이 있어 한바퀴 돌아야 찾을수 있었습니다.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 입구의 모습으로,

 

 

 

안재홍생가는 마을 야산 기슭의 원만한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안재홍(安在鴻)일제 강점기에는 언론을 통하여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자가 되기도 하였었는데 6.25때 납치되어 북쪽에서 생애를 마친 인물입니다.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우물과 함께 향나무가 자리해있는데,

높이 4m 나무둘레 1.8m의 크기로 수령 150년을 넘겼으며 평택시의 보호수로 지정 되어있습니다.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의 안채로 정면4칸, 측면 한칸반통의 초가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대청이 연이어져 있는데 대청 앞벽에 문얼굴 들이고 유리창문을 내어 여닫게 되었는데 미닫이 입니다.

 

 

 

겨울의 추위에 대비한 2중으로 나있는 창의 모습도 보이고..

 

 

 

안채의 마루의 모습으로 이곳에는 후손인듯 기거하고 있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습니다.

 

 

 

마루 뒤쪽에는 위, 아래로 크기를 달리한 벽장의 모습도 볼수가 있고,

 

 

 

건넌방 입구에서는 초상화의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

민세(民世) 안재홍 (安在鴻,1891년(고종 28)~1965년)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언론인,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역사학자이며,

해방후에는 좌우 합작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헌신한 정치가 이며  "신민족주의론"을 주창한 사상가로,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이며 경기도 평택 출신 입니다.

일제 식민지기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고대사 연구에 몰두,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으며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웠습니다.


8·15광복과 동시에 생겨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고,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10월 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1946년한성일보사(漢城日報社) 창립 사장·비상국민회의 의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고,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습니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으며

1989년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안채의 마루위에서 볼수있는 천정의 구조로,

초가의 지붕이긴 하지만 내부만 보아서는 기와집에 손색이 없을 정도 입니다.

 

 

 

해마다 새옷으로 갈아 입히며,

초가지붕이 바람에 날리지 못하게 대나무와 줄로 매어둔 모습도 보입니다. 

 

 

 

우물 옆으로 돌아 안채의 뒤쪽도 돌아보고..

 

 

 

안채 뒤편의 축대 위에서는 봄철 입맛을 돋우는 머위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안채의 뒤편을 돌아보고 우물옆으로 나오면 들어왔던 문간채의 모습이 보이고,

 

 

 

"ㄱ"자형 안채는 상량문에 의하면 1914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안채 앞의 사랑채는 누마루 우측에 방과 앞퇴가 다음간이 대청이며 방과 앞퇴로 이어지는 겹처마의 팔작기와지붕으로,

" 一"자형 사랑채는 상량문에 사랑채는 1932년에 세웠슴을 알수 있습니다.

 

 

 

사랑채는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유리창을 설치하는 등 시대적인 변화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1934년 정인보와 함께 민세 안재홍(安在鴻)은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여,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를 교열.간행하였고, 한국고대사 관련 저술과 <조선통사>를 집필한 조선학 운동의 산실이었다고 합니다.

 

 

 

안재홍 생가 사랑채 뒤에 설치된 굴뚝의 모습으로, 

연통이 지상으로 높게 올라오지 않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기와 4장을 쌓아올린 높이에 굴뚝의 구멍은 기와로만 나즈막하게 덮어놓았습니다.

이는 어려운 시절에 끼니 해결도 힘든 이웃들에게  굴뚝을 최대한 낮추어 밖에서 연기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 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정치가이자 사학자 이기도 했던,

한국 근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평택의 안재홍생가(安在鴻生家)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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